
필리프 4세는 누구인가?
'미남왕(Philippe le Bel)'이라 불린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필리프 3세와 아라곤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1284년 나바르의 여왕 잔 1세(Jeanne Ire de Navarre)와 결혼하면서 그 자신도 나바르 왕이라는 칭호를 겸하게 되었다.
플란데런과의 끝없는 분쟁
그의 통치기는 플란데런 백국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브뤼헤에서 벌어진 '아침 기도 사건(Matines de Bruges)' 이후, 프랑스군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 즉 '황금 박차 전투'에서 시민과 보병 중심의 플란데런군에게 참패를 당하며 명성에 크게 손상을 입었다.
재정 위기를 부른 공격적인 수탈 정책
방대한 전쟁 비용으로 악화된 왕국 재정을 정비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돈이 있는 집단들을 하나씩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성직자 계층, 이탈리아 출신 은행업자인 롬바르드인, 유대인, 그리고 마지막에는 타목 기사단까지가 그의 수탈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폐 질서의 동요와 물가 폭등도 함께 발생했다.
아냐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의 시작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와 정면 충돌하던 필리프 4세는 1303년 아냐니 습격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했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클레멘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고, 로마가 아닌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머물게 했다. 이것이 약 70년간 지속된 소위 '아비뇽 유수'의 출발점이 되었다.
영국과의 외교 카드, 딸 이자벨라의 결혼
에드워드 1세가 통행을 허락했음에도 기옌(Guyenne)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필리프 4세는 외교적 타협책으로 자신의 딸 이자벨라를 훗날 에드워드 2세가 될 영국 왕자와 혼인시켰다. 이 혼약은 훗날 백년전쟁의 명분이 되는 영국 왕실과 프랑스 왕실의 혈연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타목 기사단의 해체와 자크 드 몰레의 최후
1307년 10월 13일,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전역의 타목 기사단원들을 일제히 체포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기사들은 기단 내부에 이단이 스며들었다는 자백을 강요받으며 처참한 고문을 당했다. 기사단의 총장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는 1314년 파리에서 화형에 처하며 생을 마감했고, 이로써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기사단 중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죽음과 남긴 업적
필리프 4세는 말년에 사냥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권모술술의 군주만은 아니었다. 관료제와 세금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탁월한 입법가이자 행정가였으며, 프랑스 왕권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왕위 계보
전임 국왕: 필리프 3세(대담왕, Philippe III le Hardi)
프랑스 국왕 재위: 1285년 ~ 1314년
후계 국왕: 루이 10세(Louis X le Hu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