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역사

세우타 정복: 포르투갈 해외 팽창의 서막을 연 1415년의 원정

1415년에 일어난 세우타 정복은 포르투갈 해외 팽창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부르주아 계층의 지원을 받은 왕실의 목표는 금, 상아, 향신료, 노예를 실어 나르는 무어인 상단이 오가던 도시 세우타를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해상 팽창

1385년 주앙 1세(Dom João I, 1351~1433)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당시 왕국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농산물과 노동력이 부족했고 화폐 가치도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귀금속의 부족은 1402년 금 수출을 금지하는 법령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금속이 없으면 주화를 주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국왕은 경제 위기를 타개할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럽이 아닌 지중해 방향으로 왕국을 확장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세우타 정복을 위해 거대한 함대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세우타 정복: 포르투갈 해외 팽창의 서막을 연 1415년의 원정

정복의 배경

세우타가 선택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라나다 토후국 정복도 검토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이 보장된다는 점이 세우타 선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고려되었습니다.

  •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의 부유한 거점으로, 동방에서 온 상단이 모이는 교차로였으며 모로코의 곡물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방편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세우타를 정복하면 포르투갈 사회 전 계층이 이익을 기대하며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 무슬림 영토에서 기독교 신앙을 확장할 발판이 되었습니다.

내정 상황

당시 포르투갈은 국왕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는 아직 전쟁 중이던 이웃 나라들과 대비되는 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외 정복은 귀족들의 전사적 기질을 외부로 돌려 국내의 화합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은 물품 구매를 위한 새로운 해상 항로를 모색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도시의 전략적 위치에서 상업적 이득을 기대했고, 귀족은 영지와 칭호의 확장을 꿈꿨으며, 성직자는 더 많은 영혼의 구원을, 백성은 더 많은 일자리를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점과 필요가 맞물리면서 세우타 정복이 추진되었습니다.

출항과 함락

원정대는 1415년 7월 25일 리스본을 출발했습니다. 함대는 총 212척 규모로, 이 가운데 갤리선 59척, 대형 선박 33척, 소형 선박 12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탑승한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사 7,500명
  • 석궁병 500명
  • 보병 21,000명

1415년 8월 22일 도시를 함락시킨 포르투갈군은 하룻밤 사이 세우타를 약탈했습니다.

곧바로 도시 개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 상징들은 기독교 상징으로 교체되었고, 모스크는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포르투갈 왕실은 세우타 초대 총독인 페드루 드 메네즈스(Dom Pedro de Meneses, 1370~1437) 휘하에 2,700명의 병력을 남겼습니다.

세우타 정복: 포르투갈 해외 팽창의 서막을 연 1415년의 원정

점령 이후의 현실

그러나 왕실과 부르주아가 기대했던 성과는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우타 정복은 오히려 포르투갈 국고에 더 큰 부담을 안겼고, 원정 비용을 지불하고 스페인의 지원에 보답하기 위해 차관을 들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도시는 이제 유지와 방어, 식량 공급이 필요했는데, 밀 생산량이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예컨대 1419년에는 모로코 술탄국과 그라나다 토후국 군대가 도시 탈환을 시도해 한 달간 포위전을 벌였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 큰 이익을 안겨주던 상단 행렬은 다른 연안 도시로 돌려졌습니다.

불리한 요소가 많았음에도 포르투갈은 세우타에 잔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항해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1419년 마데이라 섬 점령, 그리고 1427년 아조레스 제도 점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원 부족과 낮은 인구 밀도 때문에 여러 귀족들은 해외 팽창 정책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논쟁은 1433년까지 이어졌는데, 엔히크 왕자(Dom Henrique)와 페르난두 왕자(Dom Fernando, 1402~1443), 그리고 아라이올루스 백작 페르난두 드 포르투갈(Dom Fernando de Portugal)이 해상 원정을 계속 추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 사이 주앙 1세가 서거하고 아들 두아르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두아르트 1세(Dom Duarte I, 1391~1438)는 1437년 10월 모로코의 탕헤르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승인했습니다.

전투에서 페르난두 왕자는 모로코군의 인질로 잡혔고, 그의 목숨은 세우타 반환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교착 상태는 양측 지지 세력이 대립하면서 궁정에 긴장을 조성했습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페르난두 왕자는 감옥에서 생을 마쳤고, 세우타는 포르투갈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함께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

  • 세우타는 1668년 이베리아 연합이 끝난 뒤 스페인에 넘어갔으며, 오늘날까지 스페인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 포르투갈의 영향은 건축물, 문장(紋章), '아프리카의 성모'에 대한 신앙 등에서 느껴집니다.
  • 포르투갈 포르투 시의 상벤투(São Bento) 역에는 세우타 정복을 그린 거대한 아줄레주(타일 패널)가 있습니다. 이는 원정에 사용된 선박 대부분이 이 지역 조선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최초의 대항해
  • 포르투갈의 항해
  •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
  • 브라질의 발견

이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