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대적 시리즈 8편: 비리아토
가브리엘 카스테요(Gabriel Castelló) 협력
포르투갈의 '테러리스트'이자 영웅, 전설이 된 남자
비리아토(Viriato)는 7년간 로마 공화정을 공포에 떨게 한 신화적 인물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마의 숙적(Archienemies)'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정확한 탄생일과 출생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그가 몬스 헤르미니우스(Mons Herminius), 즉 오늘날의 시에라 다 에스트렐라(Serra da Estrela) 출신이라 주장하지만, 다른 설에서는 그를 사모라(Zamora) 인근의 박케아족 도시 오칼람(Ocalam), 구체적으로는 훗날 '은의 길(Vía de la Plata)'의 정거장(만시오)이 되는 오켈룸 두리(Ocelum Duri) 출신으로 봅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현재 사모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최초의 고전적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가 남겼으며, 그를 '루시타니아 전사'로 칭했습니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그를 '목동 출신 병사'라 불렀고, 아피아노스(Appianus)는 7년간의 전역 동안 군기 문란으로 개입할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약속을 지키고 용감하며 정의로운 토착 지도자의 이미지를 전합니다.
갈바의 학살, 저항의 불씨가 되다
당시 루시타니아(현재 포르투갈 남부, 에스트레마두라, 카스티야이레온 남부)는 반항적인 지역이었습니다. 기원전 150년,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Hispania Ulterior)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가 이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습니다. 탐욕스러운 귀족 갈바에게 루시타니아 사절단이 영구 휴전과 원주민 권리 보장을 요청했으나, 루시타니아인들은 그의 무자비함을 잘 알기에 파멸적인 전쟁보다는 합의된 평화를 택했습니다.
갈바는 부족민들을 불러모아 땅을 주겠다며 평화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약 3만 명(남녀노소 포함)이 세 개의 진영에 모이자, 그는 우정의 표시로 무기를 넘기라 명령했습니다. 그 순간 고대 히스파니아 역사상 유례없는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9,000명이 군단병의 창에 찔려 죽고, 2만 명은 갈리아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극소수 생존자 중에 젊은 비리아토가 있었습니다. 그날 목격한 참상은 그의 가슴에 로마 사절단에 대한 깊은 증오를 심었습니다.
게릴라전의 대가, 로마 군단을 농락하다
이 치욕적인 만행으로 갈바는 귀국 후 기소되었으나, 뇌물과 웅변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3년간 루시타니아 반군과 집정관 군단 사이에 산발적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147년, 가이오스 베틸리우스(Caius Vetilius)의 군단에 루시타니아 부대가 포위되자 비리아토가 저항의 구심점으로 나섰습니다.
부족 회의에서 그는 자신이 지휘권을 맡으면 로마의 포위망을 뚫어주겠다고 약속했고, 부족민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비리아토는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베틸리우스의 군단을 공격해 포위망을 깨뜨렸습니다. 복잡한 히스파니아 지형과 열악한 장비로는 정면 회전에서 로마 군단을 이길 수 없음을 간파한 그는, 훗날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 같은 명장들에게 교과서가 될 게릴라전을 완성했습니다. 베틸리우스 본인도 소란 속에 일반 군단병으로 오인되어 전사했습니다.
연승과 외교, 로마를 무릎 꿇리다
이후 플라우키우스(Plaucio), 우니마누스(Unimanus), 니기디우스(Nigidius) 등 쟁쟁한 로마 지휘관들이 그의 기습과 후퇴 전술 앞에 격파되었습니다. 아피아노스는 그의 전략적 천재성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병력을 전투 대형으로 정렬해 싸울 듯하더니, 말이 트리볼라(Tribola) 도시에서 멀어지자마자 부대에게 흩어져 각기 다른 길로 빠져나가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 그는 신뢰하는 1,000명을 골라 하루 종일 로마군을 공격하고 후퇴하기를 반복하며 빠른 말로 교란했다. 본대가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되자 그 역시 달아나, 병사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외국 전쟁사』 「히스파니아 전쟁」
오직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Quintus Fabius Maximus Aemilianus)만이 그를 산중으로 쫓아내고 몇몇 반항 도시를 일시적으로 탈환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누스가 무력으로 얻은 것을 비리아토는 외교로 무력화했습니다. 그의 사절단이 히스파니아 전역을 돌며 로마 총독들의 탐욕에 시달리던 켈티베리아 부족들의 반란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원로원의 굴욕, 그리고 '로마의 친구' 칭호
지속되는 불안정에 원로원은 루시타니아 문제의 종식을 결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윌리아누스(Q. Fabius Maximus Servilianus)에게 더 많은 병력과 코끼리까지 주어 보냈습니다. 하지만 수적·전술적 우위도 비리아토를 두렵게 못 했습니다. 비리아토는 세르윌리아누스를 자신의 군대와 적절한 타이밍에 편을 갈아탄 켈티베리아 부족 사이에 가두는 대담한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양대 토착 세력 사이에 끼여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세르윌리아누스는 비리아토가 제안한 강화 조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석방된 세르윌리아누스와의 조약은 원로원에서 비준되었고, 비리아토는 두스 루시타노룸(Dux Lusitanorum, 루시타니아인의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무장 해제 없이 특권을 유지하고 '로마의 친구(Amicus Populi Romani)'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기원전 140년의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치졸한 보복: 암살과 배신자의 최후
이 불안한 평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루시타니아의 승리에 모욕감을 느꼈고, 비리아토의 성공이 켈티베리아족의 새로운 반란을 부추길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듬해 울테리오르 총독은 악랄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사절단을 핑계로 로마 영토로 불러들여, 비리아토의 심복이자 부관인 아우닥스(Audax), 디탈코스(Ditalcus), 미누루스(Minurus)에게 두둑한 보상을 약속하며 상관의 암살을 사주했습니다.
세 공모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귀국길에 잠든 비리아토를 살해했습니다. 며칠 뒤 그들은 코르두바(Corduba)에 있는 퀸투스 세르윌리우스 카이피오(Quintus Servilius Caepio) 총독(세르윌리아누스의 동생이자 후임)에게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카이피오는 망설임 없이 세 배신자를 즉결 처형하며 불멸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로마는 배신자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Roma non praemiat proditores")
전설의 최후와 발렌티아의 건립
전설에 따르면 비리아토의 유해는 아내의 것과 함께 쿠엥카(Cuenca)의 '마법의 도시(Ciudad Encantada)' 인근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후계자 타우탈로(Tautalo)는 전임자의 군사적·정신적 역량은 부족했으나 훌륭한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집정관 마르쿠스 포필리우스(Marcus Popillius)와 영구 강화를 맺어, 오랜 적대 끝에 분쟁지의 땅을 루시타니아 부족에게 돌려받았습니다.
비리아토 사후 이듬해,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전했던 로마·라틴·동맹국 참전용사들이 제대하자 당시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Decimus Junius Brutus)는 그들에게 에데타니아(Edetania)의 투리우스(Turius) 강 하구 인근 강변 섬에 땅을 주어 식민지를 세우게 했습니다. 기원전 138년(로마 건국 616년), 그들은 이 도시를 발렌티아(Valentia)라 불렀습니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이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VNIVS BRVTVS COS. IN HISPANIA IIS QVI SVB VIRIATHO MILITAVERANT AGROS ET OPPIDVM DEDIT, QVOD VOCATVM EST VALEN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