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폴레옹의 패배를 부른 바다의 결전! 넬슨 제독이 활약한 트라팔가 해전 쉽게 이해하기

세계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번개처럼 나타나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세계사를 대표하는 영웅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영국 왕립해군의 넬슨 제독 역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영웅입니다.

최강 대 최강, 천재와 천재의 대결

천재와 천재의 대결은 고대 로마의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대결 이후로 세계사의 화두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 나폴레옹과 넬슨이라는 두 영웅이 드디어 바다에서 격돌합니다.

이미 한번 격돌했던 두 사람

나폴레옹과 넬슨의 대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한 것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인 1798년, 이집트 원정 당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영국 왕립해군은 넬슨에게 나폴레옹의 상륙 저지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폭풍 등 악천후로 인해 넬슨은 나폴레옹의 알렉산드리아 상륙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직후 넬슨은 기함 뱅가드 호를 이끌고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기습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 해군은 불과 3척만 남기고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일 하구 해전'입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다의 나라, 영국

영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전쟁이 매우 잦았던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바다로 외국과 격리된 입지 조건 때문으로, 국방 차원에서 해군력 강화에 힘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이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의 언어를 익혀야 해군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육군은 육상에서 무적이었지만, 바다에서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주요 항구인 브레스트와 툴롱은 사실상 영국 왕립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프랑스는 동맹국인 스페인의 카디스에 연합함대를 집결시켰습니다.

1805년 10월, 스페인 카디스 연안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지휘하던 프랑스의 비유네브 제독은 지중해로 출항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시작

나폴레옹의 패배를 부른 바다의 결전! 넬슨 제독이 활약한 트라팔가 해전 쉽게 이해하기

영국 왕립해군의 기술이 모두 집약된 기함 빅토리 호에 탑승한 넬슨 제독이 프랑스 함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넬슨 터치, "영국은 모든 장병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비유네브 제독은 왕립해군의 접근을 감지하고 스페인 카디스로 귀항하려 했습니다. 반면 넬슨 제독은 프랑스 함대를 향해 두 열의 종진으로 돌진해 적진을 가르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이 돌격은 상당히 무모한 작전으로, 프랑스 해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넬슨 터치'라고 불리게 된 이 작전은 성공했고, 왕립해군은 프랑스 해군에 근접해 양군을 난전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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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대포의 명중률은 아직 높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이 본격적인 고정밀 포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수학 천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검토 끝에 실현된 성과로, 나폴레옹이 없는 상황에서는 포격의 정밀도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넬슨이 그까지 계산했는지, 아니면 필사적인 작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측은 서로에게 가능한 한 많은 포문을 계속 쏘아붙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패배를 부른 바다의 결전! 넬슨 제독이 활약한 트라팔가 해전 쉽게 이해하기

넬슨 제독이 탑승한 빅토리 호는 적 총사령관이 탑승한 부상타우르 호를 발견하고 산탄포로 공격했지만, 프랑스 함대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힙니다.

양군의 치열한 전투 끝에 넬슨 제독은 중상을 입었고, 프랑스 함대 다수가 불타면서 비유네브 제독은 항복했습니다. 전투 후 카디스 항에 도달할 수 있었던 함선은 불과 11척뿐이었습니다.

이로써 프랑스 해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승리를 거둔 넬슨은 "신께 감사드린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프랑스 측은 전함 18척이 나포되고 사상자 약 6,000명, 포로 7,000명이 발생한 반면, 영국 측은 전함 한 척도 잃지 않고 사상자 약 1,600명에 그쳤다고 전해집니다.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왕립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트라팔가 해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승패 원인

첫 번째 원인은 해군 기술력의 차이였습니다.

영국의 기함 빅토리 호는 1765년 진수 이래 최강이자 최고의 군함으로, 건조에 약 6,000그루의 나무가 사용되었으며 현재 화폐 가치로 약 120억 엔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포 104문, 전장 57m, 승무원 850명, 배수량 2,100톤의 초대형 전함이었습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의 기함 부상타우르 호는 전장 59m로 빅토리 호보다 길었지만, 대포는 80문, 승무원 700명, 배수량 1,800톤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해군은 싸울 의욕이 없었고, 나폴레옹의 출항 명령 자체가 어설픈 판단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의 전투 방식은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소모적이었고, 승리하더라도 지쳐버리며 인명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도 쉽게 내린 출항 명령은 무모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함대가 큰 해난 사고를 당했다고 국민에게 발표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여론 조작에 능했던 인물로, 이집트 원정의 패배를 숨기고 대승리를 발표하며 황제 즉위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영국은 넬슨 제독을 잃었지만 대승리를 온 국민이 축하했고, 지금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는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향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했지만, 나폴레옹은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완벽하게 격파합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1806년부터 유럽 전역에 대륙봉쇄령을 발동해 영국이 유럽 대륙과 교역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트라팔가의 승리가 빛을 발합니다.

대륙봉쇄로 유럽과의 교역이 막힌 영국은 교역 상대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돌려 대서양 무역으로 이익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트라팔가 패배로 해양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한 프랑스는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영국의 공업력이 없었던 프랑스 제품은 영국 제품을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실패로 끝납니다.

트라팔가 해전을 되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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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제독은 정말 멋진 인물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하고,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이 패배한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넬슨과 영국이 승리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영국은 이 전투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때까지 해상 지배권을 유지했습니다.

그 계기가 된 트라팔가 해전은 세계사의 큰 분수령이 된 결정적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