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해체된 SMAP의 명곡 '라이언 하트(Lion Heart)'가 발매되었을 당시 대형 광고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기에, 일본에서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를 아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영국 역대 국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자랑하며 '사자심왕(라이언하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두 번째 왕, 리처드 1세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두 번째 왕
리처드 1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개창자 헨리 2세와 그의 아내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는 무려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리처드는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원래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왕비였으며, 방대한 아키텐 지역의 상속권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앙주, 아키텐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프랑스 국왕과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지만, 안팎으로 적이 많았는데 그중 최대의 적은 바로 리처드를 포함한 친아들이었습니다.
장남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 헨리, 세 번째 아들 리처드, 넷째 아들 제프리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국왕들의 지원을 받아 헨리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헨리 2세는 이 연합군을 격퇴했지만, 차남 헨리와 넷째 아들 제프리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리처드는 새로 즉위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손잡고 헨리 2세를 공격해 결국 죽음에 몰아넣습니다.
1189년, 아버지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리처드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로 즉위했습니다.
사자심왕(라이언하트) 리처드

리처드 1세의 대관식 무렵, 먼 예루살렘 땅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리스도 탄생의 성지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은 살라딘. 훗날 최고의 이슬람 군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살라딘은 순식간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손아귀에 넣었고, 1187년에는 제1차 십자군의 결정인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습니다.
교황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호자인 교황으로서는 더는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에 각국 군주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유럽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대연합군이 편성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신성 로마 황제 '붉은 수염(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의 '존엄왕(오귀스트)' 필리프 2세 등 유럽을 대표하는 군주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2세 시절부터 '살라딘 십일조'라 불리는 특별세가 걷혔고,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온갖 재원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나톨리아에서 익사하면서 원정의 기운이 꺾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세력 약화를 우려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전장을 떠나 귀국해 버립니다. 이로 인해 교황과 프랑스 왕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고, 훗날 대형 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교황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국은 전혀 하나로 뭉치지 못했습니다.
리처드 1세 역시 원정 도중 시칠리아 왕국과 키프로스 총독과의 분쟁에 휘말려 양쪽 모두를 정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시리아에 도착한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작과 함께 요충지 아크레를 공략했지만, 이번에도 의견 충돌이 일어나 오스트리아 공작 역시 귀국하고 맙니다.
불화의 원인은 잉글랜드 측이 오스트리아 공작이 세운 깃발을 끌어내린 데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는 잉글랜드에 원한을 품게 됩니다.
포로를 절대 죽이지 않던 이슬람의 살라딘과는 대조적으로, 아크레를 점령한 리처드는 무슬림 포로들을 모두 처형해 버립니다.

'라이언하트'라는 별명답게 리처드는 전투에서 신들린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아르수프 전투와 야파 전투에서 아이유브 왕조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핵심 목표였던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합니다.
1192년, 그리스도교 연합군과 아이유브 왕조는 무장하지 않은 그리스도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했고, 리처드 1세는 귀국을 결심합니다.
동생의 반란과 감옥 삶
리처드가 원정 중인 사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토왕(랙클랜드, 땅 없는 왕)'이라 불린 존은 이름 그대로 영지가 없었습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영지를 물려주려 했지만 리처드가 자주 방해했고, 존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교묘히 파고들었고, 존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를 눈치챈 리처드는 홀로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국 도중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손에 붙잡히고 맙니다. 시리아에서의 원한을 품고 있던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를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기고, 잉글랜드 측에 10만 파운드라는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합니다.
존은 리처드를 외면하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려 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의 반감을 사면서 결국 몸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당시 10만 파운드는 잉글랜드 왕실 연간 예산의 약 7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귀국한 리처드 1세는 동생 존에게 분노를 터뜨렸고, 위축된 존은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의 직접 대결에 나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격전 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리처드 1세에 대한 평가
사실 리처드 1세는 영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왕보다 앙주 백작으로서의 지위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재위 10년 동안 잉글랜드에 머문 시간은 고작 5개월 남짓(약 한 달씩 다섯 번)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치는 대법관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가 실질적으로 수행했으며, 리처드가 직접 한 일이라곤 오로지 전쟁 자금을 위한 과세뿐이었습니다.
라이언하트(프랑스어로 '쿠르 드 리옹')라 불린 리처드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였고, 이는 곧 막대한 지출로 이어져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 불만은 훗날 마그나 카르타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리처드는 확실히 전투에 강했지만, 그의 승리가 잉글랜드에 가져다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교황의 권위를 지켜줬을 뿐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고로 리처드 1세는 칭기즈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살라딘, 필리프 2세 등 같은 시대 인물들 사이에서도 전투 지휘 능력은 최상급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무함마드 이후 그리스도교 진영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진영에 밀리는 입장이었고, 이 시점까지 승리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두 세력 간의 역학 관계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진영의 입장에서는 리처드 1세가 이슬람에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십자군 원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여 발칸반도를 점령했으며, 이베리아반도는 수복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1세의 승리는 그리스도교 진영이 거둔 몇 안 되는 승리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