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88년경, 로도스 섬과 크레타 섬 출신 정착민들은 시칠리아 남부 해안에 '겔라(Gela)'라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겔라는 놀라운 속도로 번영하여 건설된 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스로 새로운 식민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폴리스로 성장했습니다.
기원전 581년, 겔라 출신 개척단은 서쪽으로 진출해 원래 도시에서 불과 76km 떨어진 시칠리아 남부 해안의 고지대에 아크라가스(Akragas)를 세웠습니다. 로마인들이 '아그리겐토(Agrigento)'라고 부른 이 도시는 오늘날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고고학 유적지로 손꼽힙니다.
아크라가스는 빠르게 성장하고 부유해져 마그나 그라에키아(대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최전성기에는 인구가 15만 명에 달했으며,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워낙 높았던 탓에 그들의 과시와 사치는 곧 속담처럼 회자될 정도였습니다.
서기 3세기 초 《바리아 히스토리아(Varia Historia)》를 집필한 로마의 수사학 교수 클라우디우스 아일리아누스(Claudius Aelianus)의 기록에서도 당시 아크라가스의 번영이 잘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이 도시 사람들이 그동안 지어진 어떤 도리아식 신전보다도 크고, 양식과 구조 면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발한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신전에는 다른 어느 신전보다 많은, 무려 38기의 아틀란트(atlantes, 남자상 '텔라몬')가 세워질 예정이었고, 그 키는 7.5m에 달했습니다.
아크라가스 시민들이 착공한 것은 오늘날 '거인의 신전(Tempio dei Giganti)'이라는 이름으로도 적절하게 불리는 올림피온 제우스 신전(Temple of Olympian Zeus)입니다. 공사는 도시 건설 약 100년 후인 기원전 480년경 시작되었으며, 현재 '성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이라 불리는 일대에는 기념비적인 신전 7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 신전은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아크라가스와 시라쿠사 연합군이 승리한 히메라 전투(기원전 480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시칠리아 출신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는 신전 건설에 동원된 노동력이 바로 그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카르타고 군인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또한 기원전 406년 카르타고의 도시 정복으로 인해 70여 년에 걸친 공사 끝에도 신전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고 확언합니다. 다만 일부 연구자들은 실제 공사가 해당 전투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분명 인상적이고 독창적이었습니다. 길이 112.7m, 폭 56.3m, 높이 20m에 이르렀습니다. 정면에는 반기둥 7개(그리스 기념비 건축에서 처음 시도된 방식), 양측면에는 각각 반기둥 14개가 배치되었습니다(당시 전통적인 도리아 신전은 통상 6×13 배열을 사용).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반기둥들이 독립된 기둥이 아니라 연속 벽체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으로, 이러한 구조는 엔타블러처(entablature)의 어마어마한 하중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면에 기둥 7개를 늘어놓은 배치는 이미 한세기 전부터 '구식' 취급을 받던 고풍스러운 양식이었고, 덕분에 신전 정중앙에 출입문을 두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문은 건물 양 끝쪽에 열린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개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둥 사이사이에는 높이 7.5m(고대 그리스 조각사의 이정표로 꼽히는 규모)에 이르는 거석상 아틀란트 38기가 세워졌습니다. 아마도 수염 난 인물과 민얼굴 인물이 번갈아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모두 등을 벽에 대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어 신전의 상부를 받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발굴된 조각들을 바탕으로 복원된 아틀란트 한 기는 아그리젠토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또 한 기는 신전 유적 바로 앞 땅에서 발견되어 그 자리에서 방문객을 맞이하며 유적지 최대의 볼거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대한 숫자의 아틀란트를 신전에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고 예외적인 시도였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아크라가스 시민들의 사치와 과시 욕구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합니다.
신전 내부는 카르타고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3개의 본당(네이브)으로 나뉜 거대한 기둥 홀 가운데 중앙 본당은 외부로 열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지붕으로 덮는 것이 어려워 의도적으로 열어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지붕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공사가 중단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기둥 사이에 창문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흥미롭게도 페디먼트(박공벽)는 온전한 대리석 조각군과 함께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동쪽 박공에는 신들과 거인족의 전쟁을 그린 '기간토마키아(Gigantomachy)'가, 서쪽 박공에는 트로이 함락 장면이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동쪽 정면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기단 위에 거대한 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그 규모는 54.50 × 17.50m에 달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었습니다.
신전의 본당 구조는 797년 지진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1401년 12월 19일 마침내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중세 이후 유적은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사실은 16세기 도미니크회 수사이자 역사가인 토마소 파젤로(Tommaso Fazello)의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