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부터 1874년까지 수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페루로 건너가 혹독한 착취 속에 일해야 했습니다. 그 흔적이 고대 피라미드 위에서 드러났습니다.

페루 리마의 한 선잉카 유적지에서 최근 발견된 19세기 중국인 이민자 묘지 중 하나입니다.
선잉카 피라미드에 잠든 중국인 유해
고고학계는 왜 페루 리마 교외의 선잉카 시대 피라미드에서 중국인 무덤이 발견되었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페루 고고학자들은 우아카 벨라비스타(Huaca Bellavista), 즉 선콜럼버스 시대 민족인 이츠마(Ychsma)가 약 800년 전에 흙벽돌로 쌓은 고대 피라미드 정상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페루에서 생을 마감한 중국인 노동자 16명의 유해를 발굴했습니다.
2017년 8월 23일, 페루 문화부와 이번 발굴을 지휘한 로하나 고메즈(Roxana Gómez) 고고학자는 11구의 유해가 천으로만 간단히 감싸진 채 땅속에 직접 매장되어 있었고, 나머지 5구는 나무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고인은 여전히 변발(辮髮)을 하고 있었으며, 맥주병 하나에는 아편 파이프가 담겨 있었습니다.

19세기 중국인 이민자 유곡 옆에서 발견된 아편 파이프. 이 관은 페루 리마 우아카 벨라비스타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 Ministerio de Cultura
중국인 노동자들이 찾던 이민의 땅, 페루
선잉카 건축물의 흙 퇴적층에서 아시아인들이 발견된 특이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짚어봐야 합니다. 페루는 1854년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19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의 주요 목적지였습니다. 노예 무역은 1821년 페루가 스페인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선언한 뒤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CNRS-Credal 소속 인류학자 이자벨 로생에레라(Isabelle Lausent-Herrera)는 1994년 『미주 학회 저널(Journal of the Society of Americanists)』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미 페루 내 중국인 노동자의 존재를 다룬 바 있습니다. 그녀는 1849년부터 1874년 사이 국가 경제 재건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을 해방된 아프리카인이나 원주민이 충당할 수 없자, 푸젠(Fujian)과 광둥(Guangdong)성 출신의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아시엔다(hacienda), 즉 대규모 농장으로 들어와 그들을 대체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대토지 소유주인 아센다도(hacendado)들과 구아노 섬 농장의 특허업자들은 이미 계약 노동자, 곧 쿨리(coolie)에 대한 일종의 인신매매가 존재하던 중국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며, "중국 이주민들은 무너져 가던 제국을 떠났다. 아편전쟁(1839~1860)으로 인해 중국이 개항을 강요당하고 주요 무역항을 잃었으며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떠남을 부추기는 혼란이 빚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사라진 희망, 비참한 현실
1849년 극빈 속에서 페루에 도착한 이들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금세 산산조각 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자벨 로생에레라는 1994년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4년에서 8년에 이르는 학대적인 계약으로 페루 연안의 구아노 채굴장이나 대규모 사탕수수·면화 농장에 묶인 이 중국인들은 완전히 낯설고 적대적인 공간에 내던져졌습니다."
그녀는 "많은 자살로 이어진 절망감은 배우자의 부재로 더욱 깊어졌다"며, "아내 없이 데려와져 흑인이나 혼혈 감독관들의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극심한 밀집 상태의 기숙사에 갇힌 중국인들은 도착하자마자 악덕에 지배당하는 타락한 인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전했습니다.

19세기 말 페루의 중국인 노동자들. 푸젠성 출신 중국인들은 호키엔·민난, 그리고 특히 객가(客家) 방언 집단에 속했습니다. 이후 이 아시아 노동력의 모집은 주로 홍콩과 마카오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Ministerio de Cultura
금지된 묘지, 대안은 우아카
19세기에는 중국인 쿨리들이 리마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아카 벨라비스타에서 발견된 것처럼 즉석에서 마련된 매장이 이뤄졌습니다. 이자벨 로생에레라는 "리마 주변의 대부분 대토지는 이런 고대 성스러운 공간, 즉 우아카(huaca)를 포함한 선콜럼버스 시대 유적 주변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세례받지 못한 사람들—대체로 불교 신자나 유교 신자였던 이 중국인 노동자들—을 안장하기 위해 이 비성역(非聖域) 장소들이 사용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발견이 안데스 국가에서 처음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이런 소외된 집단의 유해가 다른 우아카나 선스페인 시대 묘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바 있습니다. 페루 북부 해안의 타르마(Tarma)와 카스마(Casma)가 그 예입니다. 다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 극동 출신 노동자들은 비교적 나은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리마 내곽의 프레스비테리오 마티아스 마에스트로(Presbítero Matías Maestro) 묘지 중국인 묘비를 연구한 로생에레라는 "도시 지역의 많은 중국인들이 임종 시점에 세례를 받았고, 그 결과 새로운 공공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 커뮤니티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중국인 커뮤니티가 페루 수도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 이민은 1909년 엄격히 제한되었고, 1930년부터는 완전히 금지되었습니다. 대형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위해 1848년 쿠바로, 철도 건설을 위해 1847년 미국으로 이주가 시작된 것과 비교하면, 페루는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 커뮤니티를 보유한 나라입니다.
참고
(1) 이츠마(Ychma 또는 Ichma)는 와리(Wari) 제국(750~1000) 해체 이후 리마 지역에 등장한 초기 대형 문화 중 하나입니다. 이들의 잉카 제국 편입은 15세기, 즉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2) Isabelle Lausent-Herrera, The Chinese of Peru: a reconstructed identity, Journal of the Society of Americanists, 1994년, vol. 80, No. 1, pp.169-183.
(3) Isabelle Lausent-Herrera, The New Chinese Immigration to Peru,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Migration, vol. 25 n°1, 2009, pp. 7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