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년 전, 중앙아시아 대륙 한복판에서 번영하던 청동기 시대의 옥서스(Oxus) 문명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이들은 누구였으며, 신전과 궁전이 늘어선 부유한 도시들은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까? 프랑스와 투르크메니스탄 공동 발굴팀의 최근 고고학 조사 결과가 이 물음에 대한 첫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신전과 궁전을 갖춘 고누르 데페(Gonur Depe) 유적은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하며, 옥서스 문명의 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글은 2021년 11월호 프랑스 과학지 『Sciences et Avenir – La Recherche』 제897호에 게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낙타들이 지켜보는 거대한 유적, 울루그 데페
투르크메니스탄의 외진 지역에서는 때때로 거대한 흙무덤 아래 낙타 무리가 드문드문 풀을 뜯는 모습이 목격된다. 오랫동안 이 풍경의 일부처럼 여겨져 온 이들은, 낮잠에 빠진 낙타의 혹처럼 생긴 '울루그 데페(Ulug Dépé)', 즉 '위대한 언덕'이라 불리는 거대한 유적을 마치 당연한 존재처럼 바라본다. 둔중한 윤곽을 지닌 이 언덕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에서 남동쪽으로 약 175km 떨어진 사막 평원 위에 우뚝 솟아 있다.
현재 국토의 80%가 카라쿰 사막으로 덮여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은 서구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중요한 고대 문명들의 요람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비로운 옥서스 문명이다. 아무다리야(Amou-Daria) 강의 고대 이름인 '옥서스'를 따 명명된 이 문명은 기원전 2300년부터 1500년까지 약 800년간, 이란 고원과 카스피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북부 힌두쿠시 산맥 사이 지역에서 발달했다.
옥서스 문명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특히 러시아 출신 고고학자 빅토리아 사리아니디(Viktor Sarianidi, 1929~2013)가 왕도였던 것으로 보이는 고누르 데페를 확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소련 연구진들이 같은 문명권에 속하는 다른 도시들도 발굴해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알틴 데페(Altyn Dépé), 우즈베키스탄의 자르쿠탄(Dzhar-kutan), 아프가니스탄의 다슐리(Dashly)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 옥서스 문명의 초상이 처음으로 그려졌다. 발견자 사리아니디는 이 문명을 지역 이름을 따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단지(Bactro-Margian Archaeological Complex)'라는 다소 시적인 이름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정주 농경·목축 사회였던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큰 강변 비옥 평야를 따라 진흙 벽돌 마을을 세우고, 소·양·염소·말·낙타를 사육하며 관개 농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메소포타미아에 견줄 만한 이동식 보물
그렇다면 이 문명은 어디서 비롯되었고, 청동기 시대 수천 명의 주민이 살았던 번창한 도시들은 왜 더 소박한 취락으로 급격히 대체되었던 걸까? 전문가들은 인간 정착에 유리했던 두 주요 지역, 즉 투르크메니스탄 북동부의 마르기아나(Margiane) 지역과 울루그 데페의 요람인 코펫다그(Kopet-Dagh) 산기슭 일대에 주목했다.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울루그 데페는 고고학자들에게 특별히 행운적인 장소다. 신석기 말기(기원전 5000년)부터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6세기)까지 끊김 없이 점유되었고, 이후 헬레니즘·파르티아 시대(기원전 3세기~1세기)까지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울루그 데페는 독특한 유적이다. 높이 30미터의 이 거대한 언덕은 신석기 말기(기원전 5000년)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단절 없이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출처: MAFTUR
프랑스-투르크메니스탄 고고학 탐사대(MAFTUR)는 줄리오 벤데수-사르미엔토(Julio Bendezu-Sarmiento)의 지휘 아래 거의 20년 가까이 이곳 15헥타르 부지에서 활동해왔다. 프랑스 아프가니스탄 고고학 대표단(DAFA)의 전 대표이자 페루 출신인 그는 현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생태인류학 연구팀(UMR 7206)에서 연구를 이끌고 있다.
"울루그 데페에서 확인되는 예외적으로 두터운 고고학 지층의 축적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현상입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한 곳에서 무려 5000년에 달하는 인류의 점유 흔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01년 이후 진행된 발굴을 통해 궁전 건축물, 창고, 성채, 성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도자기와 금속·석재·목재·직물 유물이 나왔습니다. 이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에서만 발견될 것이라 믿었던 유물들이었습니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3천년기)에 해당하는 울루그 데페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종교적 목적의 테라스를 갖춘 대형 궁전 건물군과 함께, 도자기·금속공예·석공술 등 매우 높은 수준의 생산 기술이 확인되었다. 이는 정교한 프로토-도시(proto-urban) 사회의 존재를 시사한다. 커다란 진흙 벽돌 성문은 내부 거리망으로 통했고, 그 거리들은 궁전과 높은 단 위에 세워진 신전 및 엘리트 계층의 무덤이 들어선 넓은 구역들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강하게 위계화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작은 도시들을 통치하는 종주국-속국 체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고고학자는 덧붙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성벽 도시
그러나 청동기 말기, 즉 기원전 1700~1750년 무렵 도시화에는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작은 왕국들의 집합체였던 옥서스 문명은 서서히 시들어갔다. 중앙아시아 남부 전역에는 새로운 인구 집단이 유입되어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실질적인 기술 상실이 관찰됩니다"라고 벤데수-사르미엔토는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거의 산업적 규모로 생산되던 도자기를 비롯한 제품들이 더 투박한 형태로 대체되었고, 대부분의 금속 유물은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이 변화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 논의가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중앙아시아에서는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이 격변의 원인을 밝혀줄 문자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발굴팀이 유적 정상을 향해 올라가며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축조된 성채의 잔해였다. 그러나 도시를 굽어보던 한 변 40미터의 웅장한 건물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어 두 번째 성채도 발굴되었다. "2003년 전자기 탐사를 통해 이곳의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울루그 데페에는 성채와 세 개의 대형 건물이 도시를 굽어보는 상성(上城)과, 거리와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선 하성(下城)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도시 전체가 세 개의 대형 방어문을 갖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사례입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이 지층에서는 아마도 약탈당했던 탓에 고고학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금속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무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라고 고고학자는 안타까워했다. 중앙아시아 전역이 그렇다.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2000년 무렵의 묘지에는 무려 5000기에 달하는 무덤이 존재할 수 있었다.
옥서스 문명의 절정기를 증언하는 울루그 데페에서는 풍부한 부장품을 지닌 무덤들도 발굴되었다. 그중 하나에서는 부인의 유해에 석회암 구슬로 된 허리띠가 채워져 있었고, 도자기 항아리와 이란 또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설화석제 그릇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함께 나왔다. 남편의 유해에서는 금 구슬, 아프가니스탄산 청금석, 인도 계곡산 카넬리언, 심지어 마노까지 발견되었다.

설화석제 항아리 8개가 울루그 데페 북동부에서 발굴된 '공주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사진은 줄리오 벤데수-사르미엔토가 그중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 출처: JULIO BENDEZU-SARMIENTO / MAFTUR
장례 풍습의 극적인 변화
하지만 이러한 장례 풍습은 이후 극적으로 변모한다. 울루그 데페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고인의 시신은 성벽 밖에 그냥 버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습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1500년 무렵, 즉 기원전 2천년기 후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라고 벤데수-사르미엔토는 설명하면서, 무덤 없는 문화, 즉 '시네 셉울크로(sine sepulchro)'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시신들은 짐승에게 뜯기도록 방치되었습니다. 초기 철기 시대 유적 발굴에서는 머리, 어깨, 팔 등이 없는 개별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울루그 데페의 골격 분석에 따르면 주거 유적에서 수집된 뼈의 99%는 야생 동물의 것이었고, 인골은 고작 1%에 불과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020년에 우리가 발견한 유일한 인골이 유적 북쪽 경계 성벽 바깥, 일종의 쓰레기 더미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매장에서 노출 장례로의 이 전환은 기원전 1천년기에 발전할 일신교, 즉 조로아스터교의 원형(Proto-Zoroastrianism)의 도래를 예고하는 신호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조로아스터교에서는 고인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습니다. 시신이 흙, 불, 공기, 물을 더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시신은 자연 분해되며, 청소동물들이 먹어치웁니다."라고 벤데수-사르미엔토는 설명했다. 그래서 시신들은 짐승의 밥이 되도록 버려졌고, 이 풍습은 1000년 넘게 지속되었다.
흙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남겨진 유해
예언자 자라투스트라(Zarathoustra)의 이름을 딴 조로아스터교는 시신의 매장을 금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흙을 더럽힌다고 여겨진 썩어가는 유해는 야외에 방치되어 청소동물에게 먹혔다. 기원전 4세기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도착했을 때,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개들이 사람 뼈를 다투는 참상을 목격하고 경악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풍습을 금지시켰고, 중앙아시아에서 매장 관행은 헬레니즘 정복 이후에야 되살아났다.
인구 급감이 초래한 붕괴?
인간의 시신이 더 이상 매장되지 않게 된 바로 그 시기에, 거대 궁전과 대도시들이 차례차례 사라지는 일종의 '붕괴'도 관측되었다. 이들은 덜 중요한 규모의 촌락들로 대체되었다. 지역의 실력자는 여전히 존재했겠지만, 더 이상 부를 과시하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쇠퇴의 원인을 북방 지역에서 온 호전적인 집단의 대량 이주로 추정했다. 다른 학자들은 기후가 점점 건조해지면서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고, 그로 인해 사회경제 시스템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가설을 세웠다.
비교적 습윤하던 기후는 기원전 2000~1800년 무렵 급격한 건조화를 겪으며 강의 유량을 서서히 줄였고, 카라쿰의 모래사장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그러나 옥서스 문명의 발전에는 상업 교류가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근동(近東) 및 인도 문명과의 광석 등 원자재, 그중에서도 주석과 청금석의 집중적인 교역이 그러했다. "주석 무역과 관련된 격변이 옥서스 문명의 쇠퇴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고고학자는 말한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인구가 도시 중심지에 임계 수준까지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명의 붕괴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인구 재앙 가설은 흔히 토양의 건조화나 수로의 소멸로 인한 생태 문제와 결부된다. 마지막으로 옥서스 문명은 엘리트 간의 갈등, 계급 투쟁, 사회 기능 마비 같은 내부의 정치·사회적 격변 끝에 소멸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이 문명의 마지막 시기는 상당히 미궁 속에 있다.
"고고학 발굴이 계속되어야만 비로소 이 문명의 진화 과정을, 그리고 초기 철기 시대에 '시네 셉울크로' 문화로 완전히 대체되기까지의 여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줄리오 벤데수-사르미엔토는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