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엘레 니스(Hellé Nice), 무대에서 서킷으로: 용감무쌍한 댄서이자 레이싱 드라이버

마리에트 엘렌 들랑글(Mariette Hélène Delangle), 예명 '엘레 니스(Hellé Nice)'(1900~1984)는 댄서이자 레이싱 드라이버였습니다.

뮤직홀 댄서

엘레 니스(Hellé Nice), 무대에서 서킷으로: 용감무쌍한 댄서이자 레이싱 드라이버우체부 레옹 들랑글(Léon Delangle)과 알렉산드린 부이(Alexandrine Bouillie)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에트 엘렌 들랑글은 1900년 12월 15일 프랑스 외르에루아르(Eure-et-Loir) 지방의 오네수조노(Aunay-sous-Auneau)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동차 경주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녀가 네 살이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마리에는 고향 마을을 떠나 파리로 향해 모델과 뮤직홀 댄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엘렌 니스(Hélène Nice)'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되는데(훗날 '엘레 니스(Hellé Nice)'로 굳어짐), 점차 성공과 명성, 수입을 쌓아 올렸습니다. 10년 후인 1926년에는 유럽 전역을 순회 공연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연이은 사고

춤만큼이나 엘레 니스는 운전과 스포츠카를 사랑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서킷을 달리며 속도가 주는 짜릿한 매력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1927년 7월, 한 친구가 경주 중 운전하다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운전 대신 춤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녀는 몇 달 동안 무대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그해 연말,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와 함께한 공연을 통해 다시 무대에 섰습니다.

1929년에는 스키 사고로 무릎 연골이 손상되면서 무용 인생이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습니다. 엘레 니스는 프로 레이서의 길을 선택하고 본격적으로 경주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몽르리(Montlhéry)에서 열린 여성 그랑프리에서 우승했고, 여성 세계 속도 기록까지 경신했습니다. 이렇게 얻은 명성 덕분에 부가티(Bugatti)사는 다음 경주를 위한 차량을 제공했고, 그녀는 그 대회에서도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30년에는 미국 투어를 떠났습니다.

그랑프리와 세계 신기록

큰 인기를 얻으며 화려한 나날을 보내게 된 엘레 니스는 남성 드라이버들과 정면으로 겨루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1931년, 그랑프리 서킷의 유일한 여성 선수로서 부가티 T35C를 몰고 프랑스에서 열린 5개 주요 그랑프리와 몬차 이탈리안 그랑프리에 출전했습니다. 우승컵은 거머쥐지 못했지만 서킷에 설 자격을 확실히 증명했고, 저명한 남성 드라이버들을 종종 앞서며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여러 병행 경주에도 활발히 참가해 특히 1932년 파리-생라파엘 랠리(Paris–Saint-Raphaël Rally)와 1936년 레이디스 컵(Ladies' Cup)에서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상파울루 그랑프리에서 2위로 달리던 중 고속으로 건초 더미를 들이받아 차량의 통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로 관중 4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가 다쳤으며, 그녀 역시 3일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두 달간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이 비극은 평생 그녀의 마음속 그늘로 남았습니다.

다음 해 엘레 니스는 몽르리 서킷에서 열린 여성 대상 '야코(Yacco)' 내구 시험에 참가해, 다른 세 명의 드라이버와 교대로 10일 밤낮을 운전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10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그 기록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엘레 니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자동차 경주는 중단되었고, 엘레 니스는 그 시절을 코트다쥐르(Côte d'Azur)에서 보냈습니다. 1949년, 경주 재개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그랑프리 챔피언 루이 시롱(Louis Chiron)은 그녀가 게슈타포 요원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시롱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베를린의 공식 문서에서도 엘레 니스와의 어떤 연계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비난은 그녀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고 후원자들과 친구들, 심지어 연인마저 그녀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빚에 시달리고 고립된 채 엘레 니스는 가명을 쓰며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내고, 파리의 한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말년을 이어갔습니다. 그녀의 모터스포츠 성취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1984년 10월 1일 니스(Nice)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화장 비용조차 그녀를 도왔던 바로 그 자선 단체가 부담했습니다. 유해는 자매에게 보내졌지만, 묘지의 가족 추모비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지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