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나지크 알아비드: 시리아 독립과 여성 권리를 위해 싸운 페미니스트 혁명가

나지크 알아비드(1887~1959)는 시리아의 독립과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개척자 역할을 한 페미니스트이자 분리주의 운동가였다.

부유한 가문 출신의 활동가

나지크 알아비드: 시리아 독립과 여성 권리를 위해 싸운 페미니스트 혁명가

나지크 카팀 알아비드 바이훔(Naziq Khatim al-ʿAbid Bayhum)은 1887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만 제국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궁정에 속한 귀족이었고, 삼촌은 술탄의 고문이었다. 나지크는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질 높은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양심이 눈뜨면서 불평등과 부정의에 맞서기 시작했다. 가문의 재산 덕분에 누린 특권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고,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 역시 그녀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반역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그녀는 과감한 견해와 헌신적인 사회·페미니즘 활동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스스로 일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화려한 옷들을 벗어던지고 실용적인 작업복을 입었다.

독립을 위한 투쟁

나지크 알아비드는 이스탄불에서 수학하며 터키계, 미국계, 프랑스계 학교에서 여러 외국어를 익혔다. 유학 시절 아랍 학생들이 겪는 차별에 맞선 그녀의 저항은 결국 시리아로 강제 송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에는 여성 인권 단체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카이로로 추방되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들에게 분할되었고, 시리아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 3월, 파이살 왕자를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 형태로 국가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열린 산레모 국제회의는 프랑스의 시리아·레바논 통치를 국제연맹 위임통치 형식으로 재확인했다. 파이살은 싸우기를 택하지 않았지만, 그의 국방장관 유수프 알아즈메는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나지크는 시리아의 독립을 위해 직접 무기를 들었다.

1920년 7월, 칸 마이살룬 전투는 시리아 분리주의 진영에게 참패로 끝나며 프랑스의 영토 지배를 확정지었다. 나지크도 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녀는 적십자사에서 영감을 받아 막 설립한 단체 '붉은 별(Red Star)' 소속 간호 대대를 이끌었다. 그녀는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시리아군 장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투 참전의 대가로 프랑스 당국에 의해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 정치 활동을 접겠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은 그녀는 이듬해 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페미니즘 활동

나지크 알아비드의 독립 투쟁은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과 맞닿아 있었다. 특히 그녀는 1920년부터 계속 요구해 온 여성 참정권에 평생을 헌신했다. 시리아로 돌아온 후에는 '다마스쿠스의 빛(Nur al-Fayha)' 협회를 설립해 여학교에서 아랍 문화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페미니즘 신문도 발간했다. 프랑스 당국을 두려워한 그녀는 한동안 레바논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시리아로 돌아왔다.

1922년 귀국 후 나지크는 시리아의 정치가이자 지식인인 무함마드 자밀 바이훔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그녀를 적극 지지하며 페미니즘 활동, 특히 여성 참정권 운동을 도왔다. 같은 해 나지크는 아딜레 알자자이리 등과 함께 '다마스쿠스 여성의 각성' 협회를 공동 창립하여,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재봉술과 영어 수업 등 사회 사업에 힘썼다. 여성 참정권 투쟁과 병행하여 나지크는 여성의 경제적 권리, 노동자의 권리, 휴일 보장, 출산 휴가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칠 줄 모르는 활동가였던 나지크는 1933년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상호 부조·지원 네트워크를 비롯해 수많은 조직망을 구축했다. 그중 일부 요구는 실제로 실현되었는데, 출산 휴가 제도의 확립이 대표적이다. 나지크와 다른 활동가들의 헌신 덕분에 이러한 성과들은 1943년 프랑스 위임통치 종식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녀는 1959년 다마스쿠스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