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28. 무함마드 고리, 프리트비라자 왕의 눈을 멀게 하고 돌로 목숨을 앗아가다!

28. 무함마드 고리, 프리트비라자 왕의 눈을 멀게 하고 돌로 목숨을 앗아가다!

지난 회차에서는 『프리트비라자 라소』의 기록을 바탕으로 프리트비라자 차우한 왕이 가즈니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중세·근세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여러 사료가 전하는 프리트비라자의 최후

『하미르 서사시』에는 프리트비라자가 포로로 잡혀 끝내 살해당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의 저자는 승전의 대적(大敵)이었던 프리트비라자가 아제르로 끌려와 한 궁전에 갇혔다고 기록합니다. 그 궁전 앞에서 무함마드 고리는 정무를 보았고, 이를 지켜본 프리트비라자는 깊은 비통에 잠겼습니다.

어느 날 프리트비라자 왕은 재상 프라타프 싱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의 원수를 끝장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재상은 활과 화살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사실을 몰래 무함마드 고리에게 알렸습니다.

왕의 실력을 시험해 보려고 고리는 한 장소에 조각상을 세워 두었습니다. 이미 눈이 멀었던 프리트비라자는 소리만으로 과녁을 겨냥해야 했지만, 단 한 발의 화살로 그 상을 꿰뚫었습니다. 결국 고리는 프리트비라자를 구덩이에 던져 넣게 했고, 왕은 돌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프리트비라자 차우한과 동시대인인 유스피(Yufi)와 하산 니자미(Hasan Nizami) 역시 포로가 된 프리트비라자를 언급합니다. 특히 니자미는 이슬람의 적이었던 포로 프리트비라자가 술탄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가 드러나자 살해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그가 죽은 장소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민하지(Minhaj)는 프리트비라자가 도주하던 중 붙잡혀 살해되었다고 전하고, 페리슈타(Firishta) 역시 이 견해를 따릅니다. 엘리엇(Elliot)도 민하지와 페리슈타의 설을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아불 파즐은 『아인-이-아크바리』에서 술탄이 프리트비라자를 가즈니로 데려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료 종합: 아제르에서 맞은 최후

위 저술가들 가운데 동시대인은 유스피와 니자미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후대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유스피와 니자미조차 프리트비라자의 최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니자미는 프리트비라자가 유폐된 뒤 음모 가담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의 기록과 부합합니다.

이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보면, 프리트비라자는 전장에서 포로로 잡혀 아제르로 끌려갔고, 며칠간 유폐된 뒤 아제르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측은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의 주화(鑄貨)로도 뒷받침됩니다. 무함마드 고리는 프리트비라자의 이름으로 후투바(금요 예배 설교)를 읽게 하고 그의 주화를 다시 발행했는데, 바로 그런 주화가 아제르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1192년, 인도 중세사의 막이 오르다

서기 1192년 차우한 왕조의 프리트비라자 3세가 죽으면서 인도의 역사는 중세 시대로 접어듭니다. 당시 델리, 아제르, 라호르는 인도의 주요 정치 중심지였는데, 이 세 도시 모두 무함마드 고리와 그의 총독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용맹했지만 안목이 짧았던 왕

인도의 왕위에 오른 차우한 통치자 프리트비라자 3세는 크고 작은 전쟁에서 무함마드 고리를 여러 번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한 동시에 안목이 짧은 인물이었습니다. 손에 잡힌 적을 여러 번 살려주었고, 이슬람 침략의 위력과 잔혹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마헤바의 군주 파르마르디 찬델, 칸나우지의 왕 자이찬드 가하드발, 아니힐와라의 군주 볼라 비마, 잠무의 왕 비자이라지(차크라데브) 등 같은 민족의 형제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게다가 그의 장군 스칸다, 재상 프라타프 싱, 소메슈바르마 그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이유로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은 1192년 무함마드 고리의 손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도의 마지막 힌두 황제'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의 일생은 용기와 무용의 특별한 서사입니다. 그는 용맹하고 학식이 있었으며, 학자들의 후원자였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빛나는 명성은 인도 역사의 하늘에서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8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수많은 힌두교도들의 마음속 황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인도의 마지막 힌두 황제'라 부릅니다. 그 이후로 이 땅에 그토록 강력한 힌두 왕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궁정에는 방대한 규모의 학자 집단이 모여 있었고, 그는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매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관대함과 위대한 인격의 화신이었던 셈입니다.

치토르의 스와미 사마르 싱은 프리트비라자 왕의 진정한 벗이자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프리트비라자의 영토는 수틀레지 강에서 베트와 강까지,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아부 산까지 이르렀습니다. 세상에 용기가 남아 있는 한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의 이름도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궁정에서 피어난 학문과 문화

『진팔로다야(Jinpalodaya)』와 『카트라가차 가우라바리(Khatragachchh Gauravali)』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자 왕의 궁정에서는 종교적·문학적 논쟁이 활발히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통치기에 아제르에서는 카트라가차 출신의 자인 종단 장로 진파티 수리와 우프케슈가차의 장로 파드마프라바 사이에 격론이 오갔습니다.

서기 1190년에는 프리트비라자의 궁정 시인이었던 카슈미르 출신 학자 자야낙(Jayanak)이 유명한 작품 '프리트비라자 비자야 카밈(Prithviraja Vijaya)'을 지었습니다. 다슈라트 샤르마(Dashrath Sharma) 박사는 그의 덕행을 근거로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이 존경할 만하고 신비로운 통치자였다고 평가합니다.

다음 회 예고: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의 패배로 북인도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 모한랄 구프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