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오측천, 후궁에서 황제까지

오측천(武則天, 624~705)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로, 스스로 세운 주나라(武周)의 유일한 군주였습니다.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 황태후를 거쳐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생애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권력 상승의 서사로 꼽힙니다.

황제의 후궁이 되다

오측천은 624년 2월 17일 당나라 시대에 수도 장안 또는 리저우(利州, 지금의 사천)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무조(武曌)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머니 양씨는 당나라에 앞선 왕조인 수나라 황실과 인연이 깊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 무사황(武士彠)은 하급 무관 출신으로, 몇 해 전 군사 원정에서 공을 세워 태원공(太原公)에 봉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시가, 무용, 음악, 회화 등 폭넓은 예술과 교양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12세에서 14세 사이, 무조는 '매(媚)'라는 이름으로 당 태종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뛰어난 미모뿐 아니라 강렬한 기개로도 유명했던 그녀는 곧 황제의 눈에 띄었고, 황태자이자 후계자인 이치(李治)의 관심도 끌게 됩니다. 645년 태종이 붕어하자 무조를 비롯한 선황제의 후궁들은 수도원으로 보내져 수행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당시 25세였던 그녀는 3년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고종으로 즉위한 이치는 사찰 참배 도중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여자로 삼는다"며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고종은 결국 무조를 후궁으로 맞아들입니다. 흥미롭게도 황제의 정비인 왕황후는 자식이 없는 처지에, 제2부인 소숙비(蕭淑妃)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해 오측천의 입궁을 오히려 반겼습니다.

발 뒤꿈치에서 행사하던 실권

황제는 새 후궁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무조의 영향력은 눈부시게 커져갔습니다. 그녀는 소숙비를 밀어내고 왕황후마저 위협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황후를 무너뜨리기 위한 동맹을 조금씩 넓혀 갔습니다. 첫째 딸이 태어난 직후, 왕황후가 방문하고 간 뒤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되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무조가 친딸을 스스로 살해해 황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보기도 합니다. 확증이 없자 황제는 사건을 더 파고들지 않았지만, 무조는 이어서 왕황후와 소숙비가 저주 술법을 썼다고 고발합니다. 고종은 총희의 주장에 밀려 두 여인의 운명을 그녀에게 맡겼고, 무조는 두 경쟁자를 체포한 뒤 잔혹한 고문 끝에 처형했습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녀를 정비로 삼았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의 '측천(則天)'이라는 호칭을 내렸습니다.

오측천은 모든 회의에 발 뒤꿈치(휘장) 뒤에 숨어 참석했습니다. 허약하고 만성 질환에 시달리던 남편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은 바로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에게 부과된 한계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고, 자신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을 과감히 뒤집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서 황제는 매년 하늘과 땅에 각각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오측천은 하늘(양)이 남성에, 땅(음)이 여성에 속한다며 땅에 대한 제사는 여성이 지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황제가 이에 동의하면서 황후는 매년 지제(地祭)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지위 상승의 또 다른 증거로,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귀족 대가문' 명부에 등록하기도 했습니다.

오측천은 농업과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한 수많은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세금 감면, 여성 요양 시설 설치, 과부와 노년 여성에 대한 배려,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복 기간을 아버지의 경우와 동등하게 늘리는 안까지 내놓았습니다. 또한 강제 부역에 반대하며 이를 금지하고자 했습니다. 비판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녀는 상당수 정책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녀의 통치는 불교에 대한 강력한 지원으로도 특징지어지며, 이를 통해 당나라의 도교 중심 노선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주나라의 황제가 되다

오측천과 황제 사이에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신하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두 장남이 차례로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첫째 이홍(李弘)은 독살로, 둘째는 암살로 목숨을 잃습니다. 683년, 만성 질환에 시달리던 고종은 첫 번째 위기를 넘긴 뒤 결국 아무도 없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남편과 장남들의 죽음에도 무조의 검은 손길이 닿았다고 의심합니다. 이후 셋째 아들이 중종(中宗)으로 즉위하지만 정치 실권은 어머니에게 남겨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중종을 폐위시키고, 형들보다 다루기 쉬운 막내 예종(睿宗)을 새 황제로 세웠습니다.

친정을 준비하던 그녀는 "성모(聖母)가 지상에 강림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는 사건을 연출해 스스로 하늘의 계명을 받은 듯한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아들로부터 '성모신황(聖母神皇)'이라는, 황후가 아닌 황제에 준하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690년, 오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태자로 격하시키고 스스로 '주나라의 황제'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녀는 주나라 왕조와의 혈연을 내세웠고,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아버지에게는 사후에 효명황제(孝明皇帝)의 칭호를 추증했습니다.

오측천은 강권 정치를 이어가며 제국을 강철 주먹으로 다스렸습니다. 692년에는 국방의 요충지인 타림 분지의 안서사진(安西四鎮), 즉 구자(龜茲), 옌치(焉耆), 카슈가르, 호탄을 탈환했습니다. 그녀는 돌궐 가한과 휴전 협상을 시도했지만, 가한은 그녀의 정통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측천은 가문 출신이 아닌 실력을 기준으로 하는 관료 채용 제도를 도입했고, 적대 세력을 심문하고 고문하는 심판관 조직을 만들어 대가문의 반대파를 숙청했습니다. 이 제도가 심한 비판을 받자, 그녀는 결국 심판관들마저 처형하는 방식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권력 장악 과정의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통치 아래 중국은 거대한 상업·문화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최후의 선택

74세가 된 오측천은 셋째 아들이자 한때 잠시 황제였던 중종을 태자로 세우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704년 병이 들어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이듬해 재상이 이끄는 반란에 가담한 음모자들이 그녀의 처소에 들어가 총애하던 신하들을 살해합니다. 칼이 목에 닿은 상황에서도 아들을 위압하려 했지만, 오측천은 결국 그에게 선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은 705년 12월 1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는 유언에 따르면, 그녀는 '황제' 칭호를 '황후'로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으며, 아내로서 고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