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실 출신의 십자군 지도자
베르망두아의 위그(Hugues de Vermandois)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셋째 아들로, 형인 필리프 1세 치세에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었다. '위그 대공(le Grand)'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 그는 왕가의 직계 혈통으로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정치적 무게감을 더한 인물이다.
클레르몽 회의와 십자군 결의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열린 클레르몽 회의에서 위그는 십자가를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1096년 9월 말, 그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쿠르트즈(Robert Courteheuse)가 이끄는 두 번째 십자군 부대에 합류하여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출발했다.
동방으로의 항해와 포로 생활
남부 이탈리아 풀리아 지역의 노르만 세력과 함께 머물기를 거부한 위그는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발칸 연안의 두라초(오늘날 알바니아 드라치)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비잔틴 제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도착할 때까지 필리폴리스(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에 억류되는 시련을 겪었다.
전장에서의 활약
석방된 후 위그는 소아시아에서 십자군 대군과 함께 행진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용맹함을 인정받았다. 특히 1097년의 도릴레움 전투에서 셀주크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고, 니케아 공방전과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조기 귀환과 비운의 최후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을 보기 전인 1099년, 위그는 동료들을 남겨둔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듬해 성지로 다시 떠났다. 하지만 재차 파견된 그의 군대는 소아시아에서 튀르크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니케아 근교에서 중상을 입은 위그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로 옮겨졌으나, 1102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