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앙리 4세를 암살한 왕살해자, 프랑수아 라바이약의 삶과 최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 1577~1610)은 앙굴렘 출신으로, 종교전쟁으로 온통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종종 환시를 경험했고, 서원을 하고자 했던 수도회에서는 그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앙리 4세를 암살한 왕살해자, 프랑수아 라바이약의 삶과 최후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다

라바이약은 '로브를 입은 부르주아' 계층 출신이었지만, 아버지가 성격이 포악하고 아내의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마침내 교사가 되어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낭트 칙령에 품은 깊은 원한

라바이약에게 결정적인 계기는 1598년 앙리 4세가 반포한 낭트 칙령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었는데, 가톨릭만이 유일한 참된 신앙이라 믿었던 라바이약은 왕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고, 마침내 앙리 4세 암살을 계획하기에 이릅니다.

1610년 5월 14일, 페로네리 거리의 비극

1610년 5월 14일, 병중에 있던 쉴리 공작을 문병하러 가던 앙리 4세의 행차가 갑자기 멈춥니다. 길을 막고 선 건초 마차 때문이었습니다. 라바이약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리 한복판인 페로네리 거리(rue de la Ferronnerie)에서 왕에게 달려들어 두 번이나 흉기를 찔렀고, 앙리 4세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3일 만에 끝난 짧은 최후

라바이약은 즉각 체포되었지만 도주를 시도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공범이 없이 홀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성급하게 진행된 재판 끝에 그는 13일 뒤인 5월 27일, 광란의 군중들이 운집한 그레브 광장(place de Grève)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대역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대로 말 네 마리에 사지가 묶여 몸이 찢기는 잔혹한 방식이었으며, 격분한 군중들은 그의 시신 조각마저 빼앗아갔다고 전해집니다.

앙리 4세의 죽음은 어린 루이 13세와 섭정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시대를 열게 되었고, 라바이약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살해자로 남아 있습니다.

생몰: 1577년 ~ 1610년 5월 27일
직업: 교사
죄목: 왕살해(레지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