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라이문도 베나비데스 라레아(Oscar Raymundo Benavides Larrea)는 1914~1915년과 1933~1939년, 두 차례에 걸쳐 페루 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호세 미겔 베나비데스 이 갈레고스(José Miguel Benavides y Gallegos)와 에르필리아 라레아 이 로레도(Erfilia Larrea y Loredo)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76년 3월 15일 리마의 전통적인 지역인 바리오스 알토스에서 태어나 1945년 7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베나비데스는 1884년 과달루페 성모 학교(Colegio Nuestra Señora de Guadalupe)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칠레와의 전쟁이 남긴 혼란 속에서 친차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1890년에는 사관학교에 생도로 입학해 졸업 시 최고의 영예인 명예 검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895년 벨라비스타 병영의 '2 데 마요' 포병여단에 배속되어 복무를 시작했으며, 1905년 산 마르코스 대학교 이학부에서 육군대학 과정과 수학을 공부할 때까지 '칼라오 제5' 및 '아야쿠초 제3' 대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아 1906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1907년에는 추가 군사 훈련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습니다. 중령에 올른 1909년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기동훈련에 참가했으며, 1910년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무기 구매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귀국 후 치클라요의 제9대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카하마르카와 차차포야스를 거쳐 이키토스로 이동해 카케타 강 좌안의 라 페드레라 방어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1911년 대령으로 진급했습니다. 다만 열대성 질병을 얻어 요양 차 유럽으로 떠났는데, 귀국할 때는 이미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받았습니다.
빌링허스트 대통령 축출에 가담하다
베나비데스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던 중, 1914년 빌링허스트 대통령의 의회 폐쇄 시도를 지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해임되었지만, 오히려 시비리스타(문명파) 세력의 도움을 받아 해당 정부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주도했습니다.
그는 임시 통치 위원회를 구성해 1915년 선거를 실시했고, 이를 통해 헌정 질서가 회복되며 호세 파르도 이 바레다가 두 번째로 대통령직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사 관찰단으로 유럽을 방문했으며,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는 타크나·아리카 문제와 관련해 페루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강제 추방과 망명 생활
아우구스토 B. 레기아 정권에 반대하던 그는 1921년 페루 주재 이탈리아 전권공사직을 사임하고 모든 공적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정권에 대한 음모를 꾀한 혐의를 뒤집어씌워져 다른 반대파 인사들과 함께 호주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선 안에서 그는 동료 망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배의 항로를 코스타리카 방향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과야킬로로 갔지만, 레기아 정권이 쉽게 무너지지 않고 국내에서 활동할 여지도 없자 유럽으로 건너가 레기아 정권의 반대파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1930년 루이스 M. 산체스 세로의 혁명이 성공하고 레기아가 실각하자, 베나비데스는 스페인 주재 전권공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족 사정으로 일시 귀국해 1931년 선거를 지켜본 뒤, 산체스 세로의 승리를 확인하고 마드리드로 돌아가 외교 업무를 재개했으며, 1932년에는 런던에서 같은 직위를 수행했습니다.
페루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933년 콜롬비아와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자 정부의 요청을 받아 국방협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산체스 세로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제헌의회는 그를 헌법상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의 정부 표어는 '질서, 평화, 노동(Order, Peace and Work)'이었습니다. 취임 후 대사면을 선포해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폐간되었던 신문의 발행을 허용했으며, 산 마르코스 대학교를 재개교시켰습니다. 그러나 APRA(아메리카 인민혁명동맹)는 당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판단해 그의 정권과의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1934년 국가의 긍지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콜롬비아와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 협정은 제8차 범미주 회의에서 리마에서 비준되었습니다.
임기 연장과 주요 국정 업적
베나비데스 정부는 원래 1936년 12월 8일까지 운영될 예정이었으나, 대선이 극심한 정치적 폭력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치러져 결과가 무효화되면서 같은 해 11월 13일 법률에 따라 그의 임기가 3년 연장되었습니다.
그는 육군, 해군, 항공대에 현대식 무기를 공급하고 병영을 신축했으며, 국가 안보 위기에 대비한 동원 복무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그의 집권기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외국 신용의 회복
- 칼라오 항만 터미널과 드라이독 건설
- 팬아메리칸 고속도로와 팅고 마리아까지 이어지는 중앙 고속도로 건설, 국내 자유 통행 선언
- 현재의 정부궁과 사법궁 건설 (모두 리마 소재)
- 노동자 주거 단지와 대중 식당 건설
- 근로자 사회보험 제도 창설
- 1936년 민법 공포
이 밖에도 전국 인구조사를 준비했는데, 실제 조사는 다음 정부 때인 1940년에야 시행되었습니다.
대통령 퇴임 이후의 활동과 말년
임기가 끝난 뒤 그는 1939년 마누엘 프라도 대통령으로부터 페루 원수(Marshal) 칭호를 받았으며, 곧이어 1940년 스페인 주재, 1941년 아르헨티나 주재 페루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1944년 귀국 후에는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국민민주전선(Frente Democrático Nacional) 결성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부스타만테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인 1945년, 베나비데스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카 베나비데스 디에스 칸세코(Francisca Benavides Diez Canseco)와 결혼해 프란시스카, 마리아, 오스카, 호세 등 네 자녀를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