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지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자 활동가 루시 파슨스

루시 엘딘 곤잘레스 파슨스(1853~1942)는 미국의 무정부주의 활동가였다. 탁월한 연설가였던 그녀는 인종차별과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고발하는 기사와 팸플릿을 남겼으며, 헤이마켓 광장 폭탄 테러 사건으로 처형된 남편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활동가의 탄생

지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자 활동가 루시 파슨스아프리카계 미국인, 멕시코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루시 엘딘 곤잘레스는 1853년, 아마도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노예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12세이던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될 때까지 노예 생활을 겪었다. 1871년 18세 때, 남군 출신인 알버트 파슨스와 결혼했다. 당시 텍사스에서 이 혼인 관계는 사실상 불법이었고 심한 탄압을 받았다. 살해 협박에 시달리던 두 부부는 두 자녀를 데리고 시카고로 이주했다.

루시와 알버트는 텍사스에서 이미 시작했던 흑인과 노동자 권리 옹호라는 무정부주의 투쟁을 시카고에서도 이어갔다. 루시는 옷을 지어 생계를 잇고, 남편은 인쇄소에서 일했다. 둘은 사회참여적 저널에 기고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민권, 실업자·여성·정치범·노숙자의 문제 등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 알버트의 반자본주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에서 해고당했다. 루시는 특히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던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과 교류하며, 남편의 지지로 '시카고 여성 노동자 연합(Chicago Union of Working Women)'을 결성해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1883년, 부부는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People's Association, IWPA)'를 창립했다. 루시는 기관지 디 알람(The Alarm)에 기사와 팸플릿을 기고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하루 15~18시간을 일해야 했고, 투쟁의 초점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모아졌다. 루시와 알버트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고,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파업을 호소했다. 이미 당국과 언론으로부터 '위험한 활동가'로 찍힌 알버트와 함께 루시는 자녀들을 데리고 행진에 나섰다.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지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자 활동가 루시 파슨스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가 열렸고, 알버트가 연설한 뒤 대부분의 참가자들과 함께 현장을 떠났다. 군중이 해산하던 중 경찰이 남은 200여 명의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고, 누군가가 파이프 폭탄을 던져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고,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수많은 노동자가 체포되었고 일부는 고문당했다. 알버트는 도피했으나, 7명의 활동가가 헤이마켓 살인 혐의로 기소되자 자수했다. 피살 경찰관의 친척이 배심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조작된 재판 끝에 알버트와 동지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판결은 국제적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세 명의 형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한 명은 옥중 자살했다.

루시 파슨스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증인은 그녀를 "그(알버트)처럼 완고하고 총명하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중 집회에서 생기 넘치는 연설을 하고, 다른 이들처럼 기절하지 않으며, 잔혹한 선고를 듣고도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는 여성"이라고 묘사했다. 판결 후 루시는 자녀들과 전국을 돌며 알버트의 무죄를 호소하고 재판의 부당성을 알렸다. 하지만 1887년 11월 11일, 알버트 파슨스, 아우구스트 스파이스, 조지 엥겔, 아돌프 피셔는 '블랙 프라이데이'라 불리는 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사용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1889년, 시카고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가 5월 1일을 '국제 노동절'로 제정했다.

"우리는 노예들의 노예다"

남편 사망 후 루시 파슨스는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갔다. 1905년 6월, 시카고에서 '세계산업노동자조직(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 창립에 참여했다. 검증된 연설가로서 그녀는 여성에게 참정권도 정치적 대표성도 없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우리는 노예들의 노예다"라고 외쳤다. 여성 해방에 헌신한 그녀는 여성의 해방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무정부주의 활동가 엠마 골드만(Emma Goldman)과 이념적·개인적으로 대립하며 페미니즘 노선에서도 맞섰다. 골드만과 달리 루시는 여성 억압을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로 분석하며, 계급 억압과 분리하지 않았다.

루시는 이후에도 공개 연설과 무정부주의 기사·팸플릿 집필을 멈추지 않았고, 프랑스 신문 레 탕 누보(Les Temps Nouveaux)에도 기고했다. 무정부주의 신문 해방자(The Liberator)를 직접 편집했고, 헤이마켓 순교자들의 유명한 연설들(The Famous Speeches of the Haymarket Martyrs)을 출간해 순교자들의 최후 진술을 기록했다. 1915년 1월 시카고 파업 등 여러 파업을 조직했으며, 1925년에는 공산주의 인권 단체 '국제노동방어(International Labor Defense, ILD)'와 연대했다. 1939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1년, 88세 고령에도 공개 연설을 이어갔고, 경찰은 그녀를 "천 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1942년 3월 7일, 루시 파슨스는 시카고 자택 화재로 생을 마감했다. 30년 동반자 조지 마크스탈(George Markstall)은 그녀를 구하려다 입은 화상으로 이튿날 사망했다. 그녀의 사후 경찰은 모든 서적과 개인 노트를 압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