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퀴즈

아리우스주의 연습 문제와 해설: 4세기 기독교 최대의 신학 논쟁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가 제기한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신학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아래의 연습 문제를 통해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핵심 교리와 이에 맞선 교회의 대응 과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연습 문제

문제 1

"아리우스는 한 분이신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이 영원하며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부패할 수 없는 존재라고 확언했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이 지고하고 절대적인 존재는 창조든 낳음이든 자신의 본질을 다른 존재에게 전달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 일부도 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면 복합적이거나 나눌 수 없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자식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피조되지 않고 소통 불가능한 하나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순한 피조물일 뿐이다."

FRANGIOTTI, Roque. 『이단사 – 1~7세기: 기독교 내부의 이념적 갈등』. 상파울루: Paulus, 1995, 86-87쪽.

위 글은 4세기 아리우스가 창시한 교리인 아리우스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다음 중 무엇의 존재를 부정했습니까?

a) 그리스도
b) 원죄
c) 삼위일체
d) 마귀
e) 성경

문제 2

아리우스가 퍼뜨린 교리에 맞선 최초의 교회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a)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
b) 황제 콘스탄티누스
c) 성 아타나시오스
d)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
e) 코르도바 주교 오시오

문제 3

"논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오시오와 알렉산드로스 및 다른 정통 주교들과 함께 보편적이며 에큐메니컬한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구상은 안티오키아에서 모인 주교들의 회의에서 나왔거나, 오시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안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업의 실질적 추진자는 황제 자신이었다. 참석 주교들의 여행, 이동, 식량, 숙박 제공에 이르기까지 소집부터 모든 것을 그가 책임졌으며, 회의에는 결정의 재판관으로 참석했다. 격정적이고 뜨거운 논쟁이 오간 긴장된 공의회였다."

FRANGIOTTI, Roque. 『이단사 – 1~7세기: 기독교 내부의 이념적 갈등』. 상파울루: Paulus, 1995, 92-93쪽.

아리우스주의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의 갈등이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 교리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의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a) 예루살렘 공의회
b)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 사르디카 공의회
d) 코르도바 공의회
e) 니케아 공의회

문제 4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의 제자로, 아리우스주의의 확산에 맞서 평생을 싸웠고 그 대가로 여러 차례 파문과 유배를 당한 인물은 누구입니까?

a) 성 아타나시오스
b)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
c) 아리우스
d) 교황 리베리오
e) 콘스탄티누스

정답 및 해설

문제 1 — 정답: C (삼위일체)

위 글은 아리우스의 신앙 고백과 그가 삼위일체를 부정했음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이 본질적으로 한 분이시며 세 위격으로 나타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아리우스에게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니긴 했지만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였으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그보다 열등한 종속적 존재였습니다.

문제 2 — 정답: A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우스의 교리에 맞서 최초으로 입장을 밝힌 인물입니다. 그는 먼저 아리우스에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당시의 정통 교리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했습니다. 아리우스가 이를 거부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주의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정죄했습니다.

문제 3 — 정답: E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코르도바의 오시오 또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의 영향 아래 소집했습니다. 약 300명의 주교가 모여 여러 사안을 논의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의제가 바로 아리우스주의였습니다. 공의회가 끝날 무렵 단 두 명의 주교만이 아리우스의 원칙을 부인하는 결의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파문당했습니다. 아리우스 역시 파문되고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문제 4 — 정답: A (성 아타나시오스)

성 아타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평생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 콘스탄티아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를 옹호하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고, 에우세비오스의 유배가 철회되자 아타나시오스는 아리우스파의 박해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유배와 파문을 강요당했지만, 이후에도 정통 신앙 수호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