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제2차 교황 전쟁: 바티칸에는 제임스 본드보다 뛰어난 도구가 있었다

낙하산으로 강하한 사제들, 교황 서재에 숨겨진 도청 장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선 송신기… 바티칸 정보기관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으로는? 놀랄 만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바티칸에는 정보기관이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정보 요원, 즉 성직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의사결정을 위해 이러한 보고서를 분석하며 '정보 여과망'에 통과시켰다. 교황의 측근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요원 모두에게 '정보 임무'를 부여했다. 바티칸에는 정보 요원, 분석가, 보고서, 임무가 모두 존재했으므로, 교황에게는 사실상의 정보기관이 있었던 셈이다."

이는 신임 교황 비오 12세에 관한 보고서에서 SS 장교 알베르트 하르틀이 남긴 기록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크 리블링(Mark Riebling)은 방금 출간된 저서 『스파이 교회: 교황의 히틀러와의 비밀 전쟁』에서 바티칸 정보기관이 어떻게 운영되었고 어떤 장비를 사용했는지 상세히 다룹니다. 교황청 첩보원들의 일부 장비와 작전 방식은 007 본인도 부끄러워할 법한 수준이었습니다.

바티칸의 비밀 녹음 테이프

비오 12세가 독일 출신 추기경 네 명을 알현에 초대했을 때, 그는 제3제국 내 교회의 상황과 가톨릭 신자들의 나치즘에 대한 태도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부는 방문객 중 한 명, 나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빈의 대주교 테오도어 이니처 추기경을 신뢰하지 않았고, 결국 회담을 몰래 녹음하기로 결심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기록하는 것만이 손님들의 진짜 의도와 견해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불식시켜 줄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즉위 초기에 서재에 첩보용 음향 녹음 시스템을 설치했다." 『스파이 교회』에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기술적인 부분은 무선 수신기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가 맡았습니다.

혼인 무효 선고와 맞바꾼 첩보 장비

마르코니는 이전에도 교회를 위해 일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바티칸 건물들에 최신 통신 기술을 무료로 설치했는데, 전화 교환국, 무선국, 그리고 교황 여름 별장으로 이어지는 무선 회선이 그것입니다. 그 대가로 그는 아일랜드인 아내 비아트리스 오브라이언과의 혼인 무효 선고와 재혼 허가를 받았습니다.

발명가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이 이후에도 바티칸에서 근무했습니다. 공식 교회 문서에서 그들의 업무는 "교황의 연설 녹음 및 '특별 임무 수행'", 즉 방문객 도청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서재 벽을 뚫은 드릴 작전

그렇다면 실제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성부의 개인 알현은 교황청 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그 인접 공간에는 도청 기술자들이 근무하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독일 추기경들과의 만남 전날 밤, 특별 작업반은 케이블에 연결된 마이크를 통과시키기 위해 서재 벽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소음을 피하기 위해 손드릴을 사용했고, 마찰을 줄이기 위해 올리브 오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드릴이 과열되면서 탄 기름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습니다…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앵무새 안뜰(Cortile del Pappagallo)'로 통하는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작업자들은 마침내 서재 벽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케이블에 연결된 젖꼭지 모양의 콘덴서 마이크가 구멍을 통해 통과되어 책들 사이에 은밀히 숨겨졌습니다. 마이크는 갈색 가죽 서류가방으로 위장한 휴대용 프리앰프에 연결되었고, 프리앰프에서 나온 케이블은 바티칸 정원의 참나무 숲 아래 터널을 지나 9세기 탑으로 이어졌습니다.

목을 자를 수도 있었던 강철 테이프

그곳에서 훈련된 예수회 사제들이 캐비닛 크기의 마르코니-스틸레(Marconi-Stille) 테이프 레코더를 조작했습니다. 소리는 초속 1.5미터로 이동하는 폭 3밀리미터의 강철 테이프에 녹음되었으며, 30분 분량의 녹음에는 무려 3킬로미터 길이의 테이프가 필요했습니다.

이 테이프는 '움직이는 칼날'이라 불렸습니다. 끊어질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을 문제없이 잘라낼 수 있을 정도였죠… 그래서 레코더는 완전히 폐쇄된 방에서 작동했고, 예수회 사제들은 옆방에서 원격으로 기계를 조작했습니다.

3월 6일 교황과 독일 추기경들 간의 대화(그리고 3일 후 진행된 두 번째 회담)는 녹음된 뒤 필사되었고, 마크 리블링은 저술 과정에서 이 필사본을 활용했습니다.

쿠리어를 쫓는 추적자들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교황에게는 독립적인 통신 채널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티칸 특사는 매주 익명으로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 주교들에게 교황의 지시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또한 별도의 네트워크가 제3제국 내 교회의 내부 연락망을 담당했습니다.

또 다른 쿠리어는 베를린–뮌헨–프라이부르크–쾰른–베를린 노선을 이동했습니다. 접점에서 로마로 보낼 자료를 남겨두면, 그것이 다시 첫 번째 쿠리어에게 전달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바티칸 요원들은 SS 산하 보안국인 지히카이트스디엔스트(Sicherheitsdienst, SD) 요원들의 추적을 항상 경계해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송신기, '교황의 손가락'

서신의 신속하고 안전한 전달은 바티칸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핵심 과제였습니다. 교황청은 시대를 앞선 다양한 솔루션과 장치를 활용해 왔습니다. 16세기에는 혁신적인 정보 암호화 기법이 그 예였습니다. 알파벳 배열을 규칙적으로 섞어 놓은 암호표가 사용되었고, 이 방식은 훗날 세속 국가의 정보기관들도 채택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성좌의 신호 시스템이 낮에는 거울로, 밤에는 빛으로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정보를 전달하며 유럽 전역을 연결했습니다. 이어 1930년대에는 무선 통신이 도입되었습니다. 바티칸 정원에 세워진 무선 타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송신기였으며, '교황의 손가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서류가방 속에 숨긴 비밀 보고서

나치 독일에서 정보를 전송하기 위해 바티칸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통한 전통적인 방법도 병행했습니다. 바티칸의 가장 귀중한 협력자 중 한 명인 뮌헨의 변호사 요제프 뮐러(Josef Müller)는 소형 스포츠 비행기를 직접 조종해 독일에서 이탈리아까지 날아 메라노에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편지를 바티칸으로 운반하는 담당자에게 넘겼습니다. 뮐러는 가장 중요한 보고서를 완전히 무해해 보이는 교회 문서들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눈을 속이기 위해 서류가방의 스물 개 이상의 칸에 편지를 골고루 배치한 뒤, 가방째 비행기 조종석에 던져 넣곤 했습니다.

필사본을 지킨 강철 대피소

바티칸은 다른 분야에서도 현대적인 대책을 적용했습니다. 독일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하자 교황 비오 12세는 희생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동정을 표했습니다. 이에 무솔리니와 그의 측근들은 격분했고, 두체는 "언제든 원한다면 성좌를 정복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티칸 경찰은 방첩 임무를 수행하는 민간 특수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스위스 근위대는 방독면과 자동 권총으로 무장했고, 바티칸의 기술자들은 희귀 도서와 필사본을 보호하기 위한 폭격 대피소와 강철 장갑 방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낙하산을 메고 강하한 사제들

바티칸 정보기관은 교회에 적대적인 또 다른 국가, 소련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는 바티칸 비밀 정보 조직 내에 새로운 부서를 설립했습니다. 이곳에 선발된 후보자들은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의 역사·문화·요리에 대한 지식을 갖추며, 심지어… 낙하산 강하 훈련까지 이수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소련 영내에 낙하산으로 강하해 비밀 교구를 설립하도록 훈련된 사제들이었습니다. 바티칸은 폴란드와의 연결망을 활용해 사제들을 소련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견된 성직자 대부분은 소련 당국에 의해 빠르게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전의 연장선에서,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동방 교회성성 장관 외젠 티세랑(Eugène Tisserant) 추기경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가톨릭 사제들이 독일군에 위장한 채 러시아 깊숙이 진입하게 됩니다.

지정된 거점에서 사제들은 주민들과 접촉해 지하 교구를 조직해야 했습니다. 티세랑 계획은 바티칸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작전 중 하나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러시아로 파견된 사제들은 독일과 소련 양측 모두에게 박해를 받았고, 최소 216명의 성직자가 이 과정에서 순교했습니다.

참고 문헌

  1. Riebling Mark, 『스파이 교회: 교황의 히틀러와의 비밀 전쟁』, Wydawnictwo Literackie, 크라쿠프 2016.
  2. Kurzman Dan, 『특별 임무: 히틀러의 바티칸 점령 및 교황 납치 계획』, Rebis, 바르샤바 2008.
  3. Alvarez David, 『바티칸 첩보의 역사』, Ravi, 우치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