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새로운 의미

볼히니아 대학살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결혼 서약의 말씀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암울한 시대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일조차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란히 살았지만, 마음은 달랐던 두 민족

볼히니아와 동부 소폴란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인의 민족 정체성은 폴란드인과의 대립 속에서 형성되었다. 두 민족은 나란히 살았지만, '우리'와 '타인', 로마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인과 정교회·동방 가톨릭 신자인 우크라이나인이라는 구분은 여전히 뚜렷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작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조차 이러한 양극화를 무시하고, 민족을 불문하고 서로 유대를 맺었다.

혼인은 두 민족의 전통을 하나로 묶었다. 가장 중요한 명절은 두 번씩 함께 기념했고, 결혼식은 관례상 신부의 본당에서 거행되었으며, 배우자 누구도 자신의 종교를 버리지 않았다. 자녀의 종교 문제 역시 통례에 따라 정해졌는데, 딸은 어머니의 신앙을, 아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토착 우크라이나 땅의 정화"

1929년 창설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이 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OUN 활동가들은 산(San) 강까지 이르는 영토에 단일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상을 우크라이나인들의 의식에 심어 넣었다.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깃발. 검은 바탕에 붉은색 실로 수놓은 옷을 입은 모든 남성이 곧바로 민족주의자인 것은 아니지만, 이 색 조합은 전통 우크라이나 자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분위기가 급진화되면서 민족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영토에서 타민족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물리적 절멸을 의미했다. 폴란드인, 유대인, 체코인 등 소수민족이 하루아침에 짐을 꾸려 국경 지대를 떠날 것이라고 기대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번진 분열은 혼혈 가정의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에바 시에마슈코(Ewa Siemaszko)는 저서 『동부 국경지대에서의 OUN-UPA 범죄와 폴란드-우크라이나 가정의 상황』에서, 심지어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적대감이 드러났다고 기록한다. 자매들이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기는 집안에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여기던 오빠는 일부러 우크라이나 명절에 굴뚝 수리를 했다고 한다.

운명의 해 1943년이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정신은 민족주의에 의해 완전히 잠식당해 있었다. 『폴란드 남동부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민간인에게 저지른 범죄(1942~1947)』라는 책에는 UPA가 폴란드계 주민에게 저지른 범죄 피해자들의 정확한 날짜, 장소,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비극을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안나 헤르비히(Anna Herbich)의 저서 『볼히니아의 소녀들』(호라이즌, 2018)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혼혈 가정 안에서 벌어진 참극

더욱 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혼혈 가정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루바추프군의 한 마을에서는 1944년 3월 31일, 폴란드인 아들 루드비크와 스타니스와프를 둔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카타지나 마제파(Katarzyna Mazepa)를 포함해 9명이 살해당했다. 저자들은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숨어 있던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반데라파(UPA 대원) 중 한 명, 즉 자신의 조카에게 우크라이나어로 "표트르, 너 지금 뭐 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총검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여러 교회의 신자들 역시 폴란드인 공격과 혼혈 가정 내부의 폭력에 선동당했다. 민족주의 사상에 물든 성직자들은 그들이 전파해야 할 기독교적 가치를 망각했다.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오늘날 부우카 주미요프스카(Wólka Żmijowska)는 포트카르파치에 있는 거의 완전히 텅 빈 마을로, 우크라이나 정교회 교회당이 오랫동안 서 있다. 1940년대 중반 그곳에서 벌어진 비극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대신 증오를 부추겼다. 에바 시에마슈코는 폴란드 중앙구호위원회 대표의 증언을 인용한다.

"마리앰폴레 근처 트로시아니에츠 [스타니스와프주]에서 그리스 가톨릭 본당 신부가 설교에서, 그리스 가톨릭 신자의 배우자는 재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위 혼합 결혼은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직접적으로 범죄를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의 유효성 자체를 부정했다. 재혼의 길은 열려 있었으되, 그것은 순수하게 민족적으로 순결한, '폴란드의 독'에 물들지 않은 결혼이어야 했다.

이러한 태도는 의미심장하게 평가될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믿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운동의 이데올로그 드미트로 돈초프(Dmytro Dontsov)의 견해와 맞닿아 있었다. 그는 진화론을 민족 간의 투쟁으로 치환했고, 오직 가장 강한 민족만이 생존할 기회를 가지며, 지배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그, 드미트로 돈초프.

수치를 씻어내라

에바 시에마슈코는 실제 사례를 통해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준다. 가문의 3대손 한 사람은 '인종의 더럽혀짐'과 '수치 씻기'에 대한 거의 짐승적인 이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UPA 무장대원들은 폴란드인 가장을 살해한 뒤, '폴란드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살해당한 자의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두 딸을 집단 성폭행했다. 여성들은 이 범죄에서 살아남아 거주지를 떠났고, 결국 미국으로 이민갔다. 폭력을 동반한 성행위는 폴란드성의 '물리적' 제거, 즉 '더러운' 인종의 '정화'로 이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생의 가치를 극적으로 떨어뜨렸다. 수년간 범죄를 가까이서 목격한 이들은 점차 그것에 면역이 되어갔다. 민족주의는 암세포처럼 그들의 정신을 잠식하며, 민족적으로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이념을 모든 것보다 위에 올려놓았다.

가족보다, 사랑보다 높게. 만약 누군가 적대적인 민족의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한번 '자국을 배신'했다면, 그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었고, OUN 활동가들은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다. 이것은 혼혈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라 불릴 만했다. 방법은 단 하나, 가족의 폴란드 쪽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볼히니아 학살의 잊혀진 비극 — 우크라이나인 남편은 왜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는가

볼히니아 학살 당시 자신의 우크라이나인 친족의 손에 죽은 폴란드인 여성이 몇 명이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아무도 남기지 못했다...

1943년이 되고 학살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다. 『폴란드 남동부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민간인에게 저지른 범죄(1942~1947)』는 포트카르파치 보르후프(Borchów)의 사례를 전한다.

"산 강 건너에서 하루 머물러 있던 38세의 피오트르 마주르키에비치가 UPA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크라이나인 아내는 장례식에서 '대우크라이나'를 위해 남편을 희생시켰다고 말했다."

민족 문제를 배경으로 한 가정 내 범죄의 희생자는 주로 여성이었다. 남편들은 폴란드인 아내를 죽였고, 처남들은 형제의 '수치를 씻었다'.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기던 아들들조차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볼히니아 비극의 이 자주 조명되지 않는 장은, 민족주의적 증오에 불타오른 사람들이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세력을 키우고 있으며, 민족의 순수성과 혼혈 반대 구호가 깃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가 다시 원을 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