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미 전투는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혁명군이 거둔 첫 번째 군사적 승리였습니다. 이날 혁명군은 프랑스 망명 귀족들로 보강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모든 예상을 깨고, 격렬한 포격전 끝에 유명한 발미 풍차 근처에서 켈레르만(Kellermann) 장군의 감동적인 연설이 이어졌고, 짧은 교전과 흔들리지 않는 프랑스군 진영의 결의를 확인한 프로이센 보병의 시위 행진 이후 연합군은 전장에서 철수했습니다. 발미는 유럽 군주들의 연합에 맞선 프랑스 혁명의 첫 승리를 상징하는 창립적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혁명 프랑스, 전쟁으로 향하다
바스티유 함락으로부터 3년 후인 1792년, 특권 체제를 폐지한 '8월 4일의 밤'이 지났음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1791년 헌법에 따른 군주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혁명 프랑스를 유럽 군주국들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4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 8월 왕의 권한 정지, 그리고 이어진 대규모 연합군의 프랑스 영토 침입이 그것입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반혁명 세력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 목적은 조국과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16세와 군주제의 몰락(1792년 8월 10일)으로 고무된 일부 사람들은 애국적인 열정 속에 국가의 승리를 확신했고, 특히 1792년 7월 의회가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la patrie en danger)'고 선언한 이후 적과 접촉하는 지역에는 자원입대자들이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내전 직전의 상황이었고, 준비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롱위(Longwy)와 베르됭(Verdun)이 함락되었고, 적군은 1792년 8월 중순 로렌(Lorraine) 지방을 침공해 깊숙이 진입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반역과 왕당파 음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9월 초에는 코뮌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무리가 용의자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제 혁명 정부의 생존은 오직 무기의 운명에 달려 있었습니다.
발미 전투: 사실상 '포격전'
9월 들어 연합군의 느린 진격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재앙처럼 보였고, 프랑스군은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구왕정 출신 병력과 새로운 의용군이 합쳐졌지만, 아르곤(Argonne, 로렌과 샹파뉴 사이의 자연적 경계)의 숲이 우거진 지대 너머에는 파리 앞을 가로막을 자연 장애물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사령관 뒤무리에(Dumouriez) 장군은 샬롱(Châlons)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아르곤의 진흙탕 속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1792년 9월 19일 생트메누(Sainte-Menehould) 인근에서 켈레르만 군과 합류한 그들은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을 기다렸습니다.
크루아오부아(Croix-au-Bois)에서 브라운슈바이크가 거둔 중간 승리로 인해 프랑스군은 유명한 발미 고원, 생소브(Saint-Sauveur) 풍차 주변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긴 포병 교환전 끝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이 공세에 나섰지만, 놀랍게도 수많은 미숙한 자원병들로 구성된 프랑스군 진영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공격을 받아내며 '마르세예즈'를 부르짖었고, '국민 만세(Vive la Nation!)'의 함성이 진영을 가득 채웠습니다. 켈레르만 장군은 군대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외쳤습니다. “동지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순간이다! 한 발도 쏘지 말고 적을 전진시키고, 총검으로 돌격하라!”
연합군은 첫 공격만으로 상대를 손쉽게 분쇄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진영의 완강한 모습에 놀란 그들은 공격을 멈추고 후퇴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장군들은 무리한 추격을 삼가며 신중하게 움직였습니다. 발미 전투는 '단지' 5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한마디로 포격전에 불과했습니다. 군사적 차원에서 전투의 규모는 제한적이었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실로 컸습니다. 이토록 낮은 인명 피해로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온 무장 충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발미: 상징적인 승리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발미는 구체제 출신 병사, 연맹회원(fédérés), 그리고 자원병이 한자리에 모인, 급조되고 장비도 부족한 군대가 하나로 단결해 혁명을 지켜냈다는 사실을 증명한 전투였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전투 다음 날인 1792년 9월 21일, 제1공화국은 9월 학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당통(Danton)과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의 요청에 따라 국민공회는 9월 25일 '단일하고 불가분의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승리의 도취 속에서 젊은 공화국은 같은 해 11월 제마프(Jemappes)에서 더욱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발미 풍차에서의 저항, 칼을 뽑아 들고 돌격을 지휘하는 켈레르만의 이미지, 라인 방면군의 노래(훗날의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국민 만세!'를 외치며 진격하는 병사들의 모습 등은 혁명과 공화주의 전설에 발미를 새긴 수많은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긴 역사의 서막을 연 첫 번째 승리, 발미 전투는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짜로 자리 잡았습니다.
발미 관련 참고 문헌
- 장 폴 베르토(Jean-Paul Bertaud), 『발미: 무장한 민주주의(Valmy: la démocratie en armes)』, Archives 컬렉션, 1993.
- 아르튀 쥐케(Arthur Chuquet), 『위기에 처한 조국 발미(Valmy: la patrie en danger)』, Laville 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