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하얀 피부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카트린 치머만(Kathrin Zimmermann), 훗날 '트리나 파피스텐'이라 불리게 된 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슬루프스크로 이주한 뒤 남편을 잃자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비극을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린 폭풍우와 가축들의 죽음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마녀'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마녀 혐의는 무자비한 고문과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16~17세기 유럽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가장 악명 높은 마녀재판들이 벌어졌는데, 슬루프스크의 마녀 트리나 파피스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에 못 이겨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자백했는데, 아마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른 마녀재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도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얼마 전에는 시 당국이 그녀를 명예회복시키며 그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기억해냈습니다. 대체 어떤 재판이 열렸고, 왜 트리나 파피스텐은 사형을 선고받았을까요?
행복을 좇아서
트리나 파피스텐의 본명은 카타르지나(독일식 이름 카트린) 치머만으로,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브릴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외모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매우 하얀 피부를 지닌 그녀의 독특한 미모는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대장장이 마르틴 닙코프(Martin Nipkow)와 결혼하여 포스토미노(Postomino) 마을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약초학과 살림살이를 담당했습니다. 부부는 당시 '슈톨프(Stolp)'라고 불리던 슬루프스크로 이사를 결심합니다. 이 도시는 프로이센과 동군연합 관계에 있던 브란덴부르크 영토 안에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 이후 슬루프스크 주민 대다수는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반면 카타르지나 부부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30년 전쟁을 겪으며 위기를 맞은 슈톨프는 전염병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기상 이변까지 겹치면서 농작물 흉년에 시달렸습니다.
16~17세기 유럽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가장 악명 높은 마녀재판들이 벌어졌습니다.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도시로 이주한 직후 마르틴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웃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약초 요법으로 생계를 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슬루프스크의 정육점 주인 안드레아스 치머만(Andreas Zimmermann)과 재혼하며 다시 행복을 만났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가톨릭 카시카'
어느 날 슬루프스크에 거센 폭풍우와 함께 우박이 내려쳤습니다. 우박은 밭의 농작물과 나무의 과실을 모두 갉아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는 애벌레 떼가 창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재앙이 마법 혹은 악마의 힘 때문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치머만 부부의 집 근처에서는 주로 돼지들이 원인 불명의 상태로 죽어 나갔습니다. 소문은 빠르게 이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 즉 붉은 머리의 카타르지나에게로 번졌습니다. 그녀의 독특한 미모와 사람들을 기피하는 태도가 이런 추측에 불을 지필 수 있었습니다. 여성의 비정상적 행동,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 강한 성격은 모두 이런 혐의를 낳는 빌미가 되곤 했습니다. 사회는 순식간에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마녀' 이웃을 기피했습니다. 어쩌면 그녀 본인은 평소의 은둔 성향 덕분에 이웃들의 태도에 큰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1701년 5월 4일, 카타르지나 치머만을 고발하는 편지를 들고 약사 친커(Ziencker)가 슬루프스크 시청을 찾았습니다. 그는 또한 워시노(Łosino) 마을 출신의 다른 두 마녀가 고문 중에 그녀를 지목했다는 사례도 제시했습니다. 아마도 약사는 경쟁자를 없애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약초 지식을 활용하며 약국의 서비스를 대신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는 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 자프루트코-야니차(Aleksandra Zaprutko-Janicka)가 '벨카 히스토리아(Wielka Historia)' 포털에 쓴 글 중 하나에서 우리는 이런 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녀 혐의는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남편들은 이를 통해 원치 않는 아내를 없애고, 이웃들은 농장을 차지했으며, 장사꾼들은 경쟁자를 처리하거나 단순히 복수를 했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공격받았다. 특히 의술을 하는 여성들이 말이다."
위험한 상황을 깨달은 부부는 도시를 떠나 그단스크로 가려 했지만, 그 계획은 슬루프스크를 떠나려면 높은 비용을 내야 한다고 요구한 당국에 의해 막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 집행인이 치머만의 집에 찾아와 카타르지나를 체포했습니다.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녀의 탑'에 유폐되었습니다. 지붕 위의 빗자루를 탄 마녀 조각상이 상징인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녀의 탑'에 유폐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몸값으로 사려고 노력했음에도 그녀에게 정식 기소장이 제출되었습니다. 68개 조항으로 작성된 공소장은 그녀가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엉덩이의 검은 반점을 근거로 사탄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농작물을 황폐화시킨 기상 이변과 돼지 역병에 걸린 저주를 퍼부은 장본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초기 심문에서 카타르지나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로스토크 대학교 법학부로 서신이 발송되었고, 1701년 7월 27일 해당 학부는 피고인에 대한 고문을 허가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행에 큰 관심을 보였던 슬루프스크 주민들은 카타르지나를 조롱 섞인 별명인 '트리나 파피스텐(Trina Papisten)', 즉 '가톨릭 카시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별명은 그녀의 이름(카트린)의 애칭형에서 유래했으며 그녀의 종교를 가리킵니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가톨릭 신자를 '파피스트(papist, 교황 추종자)'라고 불렀는데, 물론 이는 부정적인 표현이며 교황 지지와 같은 의미였습니다.
헥센프로체스(Hexenprozess) — 마녀재판
마녀의 탑에는 수많은 고문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슬루프스크 주민들은 슬루피아 강변, 탑 인근을 산책하기를 꺼렸습니다. 아마도 어떤 저주가 미칠까 두려웠거나 건물 안에서 새어 나오는 처절한 비명에 겁먹었던 것입니다. 탑에 끌려온 트리나 역시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심문에서도 그녀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에게 연속적인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고문대에 묶인 채 팔다리가 부러졌고, 수많은 교묘한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신음하는 그녀는 다시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다 발각됩니다.
그녀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다시 고문실로 끌려가 또 한 차례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집행인들이 그녀의 피부에 뜨거운 납을 붓고 손톱 밑에 나무조각을 박아 넣었습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 앞에서, 지쳐 불구가 된 트리나는 결국 대부분의 혐의를 자백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고문에 입회한 판사가 트리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답변을 기록했습니다. 이 심문에서 그녀는 첫 남편과 함께 포스토미노에 살 때 다른 두 마녀와 접촉했다고 진술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이 진술을 철회했습니다.
고문대에 묶인 채 팔다리가 부러졌고, 수많은 교묘한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701년 8월 30일, 트리나 파피스텐은 법정에 섰습니다. 공소장과 고문으로 확보된 진술서가 낭독된 후 피고인에게 최후의 변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 카타르지나는 검으로 목을 베는 신속한 처형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트리나 파피스텐을 화형에 처하기로 선고했습니다. 형은 마녀의 탑 근처에서 집행되었으며, 피고인은 사다리 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법원 판결이 낭독되고 관례적인 공개 규탄이 진행된 후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습니다. '가톨릭 카시카'로 알려진 카타르지나 치머만은 슬루프스크에서 마녀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마지막 여성으로 기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