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분쟁 지역 국경 양쪽에는 공격 준비를 마친 군대가 집결해 있었습니다. 체코와 폴란드는 모두 클로츠코(Kłodzko), 자올지에(Zaolzie), 라치부르시(Racibórz)를 두고 싸울 결의였습니다. 스탈린이 중앙유럽에 남긴 공적이 있다면, 바로 제3제국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전쟁을 막은 일일 것입니다. 소련 지도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폴란드군은 거의 틀림없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로 진입했을 것입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의 불화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8년부터 양국은 자올지에를 두고 다투어 왔습니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체코가 점령했고(양자 간 합의에 반해, 그러나 서방 열강의 묵인 아래), 이후 나치가 주데텐란트를 병합하던 1938년 폴란드가 되찾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쟁은 잠시 뒷전으로 밀렸지만, 양국이 상실했던 국가를 되찾는 순간 새로운—그 어느 때보다 훨씬 심각한—분쟁의 그림자가 지평선에 드리웠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문제는 자올지에만이 아니었습니다. 분쟁 목록에는 독일이 물러난 뒤 하부 실레지아의 분할 문제와, 1939년 슬로바키아가 점령한 국경 도시들의 반환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 역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걸었지만, 동시에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이미 동부 변경주 전체를 내준 데다 추가 영토마저 포기한다면 민심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반대로 국경 확장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간기 내내 이어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올지에 분쟁. 먼저 체코가 점령했고, 1938년에는 폴란드에 편입되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이웃들
안나 슈체판스카(Anna Szczepańska)가 저서 『바르샤바-프라하 1948-1968』에서 기술하듯, 이미 1945년 3월 자올지에의 폴란드계 활동가들은 폴란드 임시정부에 이 지역의 조국 편입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방장관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Michał Rola-Żymierski)는 즉각 그들의 요구에 화답했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선의와 지원을 보증하면서, 국경 획정 문제와 관련해 체코슬로바키아에 강경 입장을 취할 정부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5월, 폴란드인들은 분쟁 지역에 시민위원회와 국민평의회를 설립했고, 국내군(Home Army)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자올지에' 작전집단이 올자(Olza) 강의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복잡해졌습니다. 롤라-지미에르스키의 발표와는 달리, 붉은 군대 병사들과 체코인들은 즉시 폴란드군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린 것입니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분쟁의 상징, 체신(Cieszyn).
임시정부는 스탈린에게 체코군과 행정 당국의 해당 지역 철수를 요구하는 각서를 보냈습니다. 한편 체코 측은 폴란드인 주민에 대한 등록과 이주 조치를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말 슬로바키아와 접한 국경 마을들을 폴란드에 반환했지만, 곧바로 슬로바키아인들이 폴란드 당국에 의해 차별받거나 박해받고 있다는 선전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양측에서는 폭동, 약탈, 민족 간 공격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양국 모두—스스로 판단하기에—공격을 개시할 완벽한 명분을 갖춘 셈이었습니다.
공격 신호를 기다리다
6월, 폴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추가 각서를 보냈고, 이번에는 무력 사용을 공언했습니다. 6월 16일, 안나 슈체판스카의 기록에 따르면:
바르샤바 정부는 자올지에의 폴란드인들에게 등록 조치에 응하지 말고 땅을 지키라고 호소하며, 반드시 구원하러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폴란드군은 실제로 체신 실레지아에 진입했고, 체신에는 강경파의 대명사인 롤라-지미에르스키 장관이 직접 찾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57헥타르가 점령되었고, 부대들은 추가 공세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45년 6월, 체코군은 라치부르시 인근까지 진출했습니다. 전쟁은 문자 그대로 일촉즉발의 국면이었습니다.
체코 측 역시 클로츠코와 라치부르시를 자국에 편입시키기 위한 강도 높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특히 라치부르시에 대한 야망은 결코 접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5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작전집단은 옛 독일 도시 인근까지 도달했고, 소련의 압력으로 겨우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체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5월 말 워싱턴, 파리, 런던, 모스크바, 바르샤바에 외교 각서를 보내 자국 군대가 클로츠코를 무력으로 점령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6월 10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이 다시 한번 라치부르시에 접근했습니다.
폴란드 당국은 농담으로 넘길 단계가 지났다고 판단했습니다. 보레스와프 비에루트(Bolesław Bierut)는 군대를 국경으로 파견했고, 롤라-지미에르스키는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에게 군 철수를 요구하는 각서를 전달했습니다. 6월 17일, 폴란드군은 클로츠코 회복 작전을 개시했고, 체신 지역의 부대들에는 자올지에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전쟁은 문자 그대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제야 스탈린이 이 문제에 강경하게 개입하여, 압박과 위협을 통해 무력 충돌의 위험을 불식시켰습니다. 오늘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발발은 고작 하루아침의 일이었던 셈입니다.
참고 자료
- 안나 슈체판스카, 『바르샤바-프라하 1948-1968: 명령된 우정에서 위기까지』, 슈체친대학교 학술출판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