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억연구소(Institute of National Remembrance)에 보관된 서류철에는 우치(Łódź)로 끌려간 사람들, 때로는 가족 전체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다. 1939~1945년 스포르나(Sporna) 거리 수용소에서 독일 당국은 폴란드 아동과 청소년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했다. 그들이 인종적으로 '순수'하지 않다고 판정되었기 때문이다.
크라쿠프 리포르마츠카(Reformacka) 거리의 창밖 풍경과, 우치 수용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순간들을 하나씩 되새길 때 느껴지는 감정 사이의 대비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기록 속 상황들은 마치 멀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 쪽지와 함께 천국에 갈 겁니다"
언론 스크랩 중 하나에는 티아르크스(Tyarks)라는 이름의 친위대 하급돌격대지도자(Untersturmführer)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는 스포르나 거리의 인종 심사 캠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우치 나치 범죄 조사 지역위원회의 요청으로 현지 언론은 1971년 그의 사진을 게재하고 수색에 나섰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신문들은 독자들에게 물었다.
스포르나 캠프가 운영되던 방식은 나치 당국이 1939~45년 폴란드 아동·청소년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에 남아 있는 수많은 생존자 증언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
"1941년 1월, 저는 어머니와 함께, 당시 많은 폴란드 가족들처럼, 우치의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기억하기로는 우리는 커다란 공장 홀에 수용되어 며칠을 머물렀고, 이후 다른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서도 공장 홀이 생활 공간으로 쓰였고, 그곳에는 수많은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며칠 뒤 우리는 특별한 방으로 불려가 열몇 명의 제복 입은 독일인들로 구성된 위원회 앞에 섰습니다. 모자에 해골 문양이 박혀 있었기에 SS 부대 장교들이 분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피상적인 검사를 받았습니다. 머리와 손을 살피고, 키를 재었습니다. 어머니는 검사받지 않았습니다. 이 절차가 끝난 뒤 어머니는 한 장의 쪽지를 받았습니다."
"방을 나서자 한 폴란드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이 쪽지와 함께 천국에 갈 거라고. 그것은 곧 독일행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카드를 받지 못한 가족들은 총독부 관할 지역으로 내몰렸습니다."

우치의 수용소는 게토 구역 안에 설립되었다.
"같은 날, 카드를 받은 모든 이들은 다시 어떤 방으로 끌려가 소독을 받았습니다. 목욕 후 우리는 스포르나 거리의 방들로 옮겨졌습니다. (...) 거기서 저는 몇 시간에 걸친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머리, 손, 발, 신장 등 각종 치수가 모두 측정되었습니다. 어머니도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후 어머니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딸이 두 번째 'Rassedeutsche'(인종적 독일인) 그룹으로 분류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독일에 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요."
아마도 인종 사무국의 독일인들은 어머니 때문에 아이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스탈라크 III B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아버지를 데려와 "순혈"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더 알아보기: 가족의 강제 분리, 죽은 자에 대한 품위 있는 매장의 거부, 강제 낙태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일한 폴란드인들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P" 글자가 새겨진 완장
번호표가 없었다면 전쟁 전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통적인 가족사진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하다. 상록 덩굴이 감긴 기둥과 배경의 커튼이 그려진 벽만 빼면 말이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있고, 가족들은 20세기 전반 사진 특유의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살짝 미소 짓고 있다. 증언 과정에서 알렉산드라 하우프니차크(Aleksandra Chałupniczak)는 스포르나 거리 인종 캠프에서 찍힌 바로 그 사진을 보여준다.
"촬영 당시 아버지의 발치에는 1060번 번호판이 놓였습니다. 또한 기억하기로는 저 혼자, 부모님 없이 세 방향에서 같은 번호를 붙인 채 촬영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독일화 대상으로 선정된 아이들이 사진을 찍혔다.

이 글은 에벨리나 카르핀스카-모레크(Ewelina Karpińska-Morek)의 책 『소슈카, 아이들은 전쟁을 꿈꾸지 않았다』(Soszka. Dzieci nie marzyły o wojnie)에서 발췌한 것으로, 최근 출판사 M(Wydawnictwo M)을 통해 출간되었다.
"우리 가족의 이후 운명은 하노버 근교의 힐데스하임(Hildesheim)으로 옮겨지면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마을의 요양원에서 방 하나를 배정받아 약 1년 반을 지냈습니다. 그 후 랑거하겐슈트라세(Langerhagenstrasse)에서 방 두 개와 주방으로 된 아파트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우체국 직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가족이 많은 독일 여성의 집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독일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가 폴란드인임에도 부모님은 'P' 완장을 찰 필요가 없었습니다." — 알렉산드라 하우프니차크의 증언이다.
'P' 글자가 적힌 완장은 주로 강제 노동자들이 차야 했지만, 모든 농장주가 이를 철저히 집행한 것은 아니었다. 증언의 맥락으로 미루어 볼 때, 어머니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가족 전체가 독일화 대상으로 선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레벤스보른의 '자선' 활동
"우리는 독일인 기준에 맞춘 식량 배급표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감시당했습니다. 검사관이 집에 찾아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독일어를 사용하는지 확인했고, 제 학업 성적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검사 중 한 번, 저는 검사관으로부터 18세가 되면 독일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특별 시설에 수용되어 그곳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검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알렉산드라 하우프니차크의 성장과 학업을 감시하던 인물이 언급한 이 '특별 시설'은 아마도 레벤스보른(Lebensborn) 센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레벤스보른은 자선단체로 소개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활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소녀를 레벤스보른으로 겁주는 것 자체가, 독일인들이 꽤 성공적으로 흐릿하게 포장한 이 조직의 진짜 목적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레벤스보른에서 태어난 아이들.
훌륭하게 갖춰진 레벤스보른 시설에는 혼외자 출산으로 인한 수치를 피하고 싶은 미혼 여성들 등이 입소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레벤스보른 센터의 '보호' 활동을 통해 독일 사회는 아리안족, 즉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아이들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조직은 그리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레벤스보른이 독일 사회에 기여한 성과는 고작 1만 1천 명의 아이들에 불과했다.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는 독일 작가이자 언론인인 폴커 쿠프(Volker Koop)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것은 이 기관 활동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 사실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러시아에서 무고한 아이들의 정체성을 빼앗은 범죄를 가릴 수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부터 레벤스보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 주로 동유럽에서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아이들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함께 읽기: 목표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아리안 군대를 창설하고 '독일의 피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5년 나치는 인간 번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출처
이 글은 에벨리나 카르핀스카-모레크(Ewelina Karpińska-Morek)의 책 『소슈카, 아이들은 전쟁을 꿈꾸지 않았다』에서 발췌한 것으로, 최근 출판사 M을 통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