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차보의 식인사자: 철도 공사장을 유린한 두 마리의 악몽, 100명 이상의 희생자

밤이면 나타나 울타리를 넘고 가시철조망을 피하며 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텐트에 뛰어들어 희생자를 끌어내 날카로운 송곳니로 몸을 찢고 살점을 뜯어먹었다. 19세기 말, 동아프리카에서 철도를 부설하던 영국인들은 지옥을 그대로 경험했다. 두 마리의 식인사자가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1898년, '목적지 없는 미친 철도'라 불리던 몸바사-우간다 철도 공사가 현재의 케냐에 해당하는 차보 강변에 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열차가 강을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고, 이 때문에 공사는 몇 달 동안 멈춰 서야 했다.

차보의 식인사자: 철도 공사장을 유린한 두 마리의 악몽, 100명 이상의 희생자

패터슨이 사냥한 '흉기' 중 하나

영국은 주로 인도에서 데려온 수만 명의 노동자를 현장에 투입했고, 차보 위에는 도시 하나에 버금가는 거대한 캠프가 형성되었다. 이 대규모 인력을 총괄한 것은 존 헨리 패터슨 중령이라는 기술자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게으름과 무단결근, 절도, 폭력 시비, 공사 재해, 말라리아 창궐, 극악의 자연환경과 기후만 맞닥뜨릴 줄 알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사람을 마치 사냥감처럼 노리는 분노에 찬 포식자들까지 공사를 방해하게 된 것이다.

갈기를 잃은 짐승들

차보 캠프가 조직된 직후부터 원정대 지휘관 패터슨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덤불에서 노동자들의 학살된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시신은 일부가 먹혀 있었고, 땅바닥에는 잘린 팔다리와 찢긴 장, 물어뜯긴 머리, 발가벗겨진 갈비뼈와 다리가 널려 있었다. 원정대 지도부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사람을 노리는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사자였다! 겁에 질린 인도인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밤이 되면 갈기 없는 수컷 두 마리가 캠프에 몰래 잠입해 번갈아 사냥을 벌이고 있었다.

패터슨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극도로 겁먹은 노동자들은 일을 계속하기를 거부했고, 파업의 그림자가 이미 늦어진 공사 일정을 더욱 지연시킬 위기로 다가왔다. 지휘관은 즉각 조치에 나섰다. 캠프 주위에 가시덤불로 높은 울타리를 쌓게 하고, 밤마다 모닥불을 피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차보의 식인사자: 철도 공사장을 유린한 두 마리의 악몽, 100명 이상의 희생자

시카고 필드 박물관에 전시된 차보의 사자들

이 정도면 짐승들을 쫓아낼 수 있으리라 여겨졌지만, 곧 희망은 헛된 것임이 드러났다. 캠프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을은커녕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사자들은 가시철조망을 뚫는 법을 익혔고, 모닥불은 그저 피해 다닐 뿐이었다. 피에 굶주린 짐승들은 희생자를 텐트에서 직접 끌어내 끔찍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두게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밤뿐 아니라 낮에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령의 복수

상황은 절박해졌다. 창백한 공포가 캠프 전체를 마비시켰다. 패터슨은 매복 작전을 시도했다. 무장한 인원들과 함께 말뚝에 묶인 염소를 미끼로 삼아 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허사였다. 힌두 노동자들의 텐트 행렬은 수 마일에 걸쳐 펼쳐져 있었고, 사자들은 어디서든 공격할 수 있었다. 밤마다 캠프 구석구석에서 희생자들의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편 공포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인도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집을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쌌고, 어떤 이들은 나무 위에서 잠을 청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땅속 움막을 지었다. 그러나 피에 굶주린 짐승들은 그런 소소한 방어 따위 개의치 않았다. 철조망을 뚫고, 나무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고, 땅을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이 기묘하고 갈기 없이도 극도로 흉포한 사자들이 짐승이 아니라, 철도 노선이 지나가던 주변 부족의 주술사들이 보낸 악마의 화신이라는 믿음이 퍼져갔다. 이를 계기로 인도인과 아프리카인 노동자 사이에 추가적인 갈등까지 불거졌다. 인간의 힘으로는 살육의 짐승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파업은 늘어났고, 추가 임금이 요구되었으며, 작업 중단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탈영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은 화물열차 선로에 몸을 눕혀 열차를 멈춰 세우고, 그저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객차에 몸싸움 끝에 올라탔다.

패터슨은 사자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정대 전체를 구하려면 반드시 이들을 죽여야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탐욕스러운 사냥꾼이었던 그는 인도에서 아프리카로 오기 전 호랑이 사냥에 여러 차례 참여한 바 있었다.

중령은 사격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하고 직접 포식자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과는 없었다. 결국 원정대에 지원군이 요청되었다. 영국령 동아프리카 경찰대장이 시파히(힌두 출신 영국 제국 복무 병사) 부대를 이끌고 캠프에 도착했다. 시파히들은 노동자 캠프 곳곳에 배치되었고, 노동자 텐트로 위장한 사자 유인용 우리까지 설치되었다.

어느 날 밤, 짐승 한 마리가 함정에 빠졌다. 무장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거대한 우리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적어도 공격자 한 마리는 제압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짐승의 모습에 겁먹은 시파히들은 사살에 실패했다. 조준하고도 빗나갔고, 그중 한 발이 우리 문 걸쇠를 손상시켰다. 분노한 짐승은 돌진하더니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다음 기회는 1898년 12월 9일에 찾아왔다. 흥분한 노동자 무리가 패터슨의 텐트로 달려왔다.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격렬하게 몸짓을 했다. 영국인은 단편적인 문장들에서 사자가 또 습격해 캠프 근처에서 먹이를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들었다. 이번에는 당나귀가 희생자였다. 패터슨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소총을 집어 들고 포식자가 연회를 벌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바라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자의 모래빛 털가죽을 발견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로 붉게 물든 짐승의 입이 희생자의 내장에 파묻혀 살점을 뜯어내고 있었다. 패터슨은 최대한 조용히 몸을 숙여 다가갔지만, 포식자는 놀랄 만큼 경계심이 강했다. 노동자 한 명이 부츠 밑에서 부러지는 나뭇가지를 밟자 짐승은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사냥이 신속히 조직되었다. 냄비를 들고 나선 힌두인들은 사자를 쫓아내겠다고 필사적으로 두드렸다. 패터슨도 사격을 가해 명중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짐승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자는 먹이를 다 먹을 시간이 없었다. 당나귀 시체는 갉아먹힌 정도에 불과했다. 패터슨은 이를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노동자들에게 시체를 고정시켜 사자가 끌어낼 수 없게 하고, 근처 나무에 대피대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포식자가 먹이를 회수하러 돌아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해가 지자 덤불 사이로 가늘지만 강력한 짐승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보의 식인사자: 철도 공사장을 유린한 두 마리의 악몽, 100명 이상의 희생자

차보 사자들의 두개골

패터슨은 사자가 당나귀 시체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자가 오히려 사냥꾼이 앉아 있는 대피대의 비계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짐승은 앞발로 비계를 건드리고 흔들리는 구조물 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패터슨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정확히 조준하는 데 성공했고, 사자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사냥꾼은 다시 총구를 겨눴다. 부상당한 포식자는 수풀로 도주했고, 힌두인들은 감시탑을 에워쌌다. 어떤 이들은 냄비를 두드려 짐승을 쫓으려 했고, 다른 이들은 패터슨을 찬양하며 외쳤다. "마바라크!(구원자)" 감사에 겨운 쿨리(노동자)들이 외친 말이었다.

영국인은 밤에 짐승을 찾지 못하게 금지했다. 근처에 두 번째 사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는 자신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았다. 거대한 갈기 없는 고양잇과 동물이 캠프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죽어 있었던 것이다. 몸에는 두 개의 총상이 있었다. 한 발은 허벅지를, 다른 한 발은 가슴을 꿰뚫었다. 무게 수백 킬로그램에 길이 3미터에 달하는 시체를 운반하는 데 무려 여덟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성공은 불가능의 벽을 무너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포식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패터슨은 먹지 않고 남긴 미끼에 함정을 설치한 것이다. 동아프리카 철도 공사를 거의 중단시킬 뻔했던 끔찍한 살인 연쇄극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사자들이 최소 28명의 노동자를 살해한 것으로 추산되지만, 패터슨 본인은 수십 년 후 100명이 훨씬 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 동물들이 왜 그토록 인육에 대한 입맛을 개발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평소 사자는 사람을 피하는 편이며, 공격하는 경우도 드물다. 왜 이번에는 달랐던 것일까?

악의 화신

연구 결과, 이런 사자들은 케냐의 이 지역에만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갈기가 없는 것은 기후 조건이나 포식자들의 높은 테스토스테론 수치 때문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평범한' 수컷 사자는 사냥에 참여하지 않고 암컷이 사냥을 담당한다. 또 다른 이론은 사자들이 갈기가 없었던 이유가 오히려 낮은 테스토스테론 수치 때문이며, 이는 무리 내에서 다른 수컷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차보 사자 개체군에는 수컷이 한 마리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암컷이었다.

인육에 대한 입맛의 기원 역시 미스터리였다. お아마도 그들의 식성은 과거 이들이 배회하던 지역에 노예 이동로가 지나갔다는 사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학살의 행진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황야에 버려졌고, 포식자들에게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게다가 시신들은 얕게 묻히거나 아예 매장되지 않았다. 인간 시체에 대한 접근이 동물들의 '미식 취향'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식인' 성향은 가뭄 기간에 이 지역의 사자들이 영양과 같은 초식동물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 1890년대 아프리카를 휩쓴 우역(rinderpest), 즉 고도로 전염성이 강한 소 전염병도 자연 먹이 부족에 한몫했다.

또한 두 마리의 수컷이 '나란히' 사냥했다는 점도 이례적이었다. 평소 동물의 왕은 갈기가 없더라도 무리를 짓지 않고, 암컷 하렘과 영토를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협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동물 뼈대에 대한 분석은 흥미로운 결론을 낳았다. 한쪽의 교합 이상(부정교합)은 사냥 중 통증과 먹이를 물 때의 어려움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어쩌면 포식자가 더 사냥하기 쉬운 인간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자는 '장애'를 가진 동료를 돕는 혈족 수컷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포식자들이 노동자 학살을 벌인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들의 최후는 패터슨의 실내 장식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동물들을 사살한 공로로 2만 5천 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그는 사자들에게서 가죽을 벗기도록 명했고, 가죽은 거실의 융단으로 쓰였으며, 짐승의 두개골은 기념품으로 보관되었다. 긴 가을 저녁마다 스카치를 기울이며 그는 수혈을 얼어붙게 했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짐승의 텅 빈 눈구멍을 응시하곤 했을 것이다.

차보 강 위의 다리는 1899년에 완공되었다. 식인사자를 사살한 패터슨은 명성을 얻었고, 1907년에는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한 일기를 출판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기념품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트로피를 무려 5천 파운드에 처분했다.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이 영국인에게서 이것들을 구입한 것이다. 가죽은 정비된 뒤 박제되었고, 이렇게 차보의 사자들(짚으로 만든 내장 포함)은 박물관 전시품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