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날개 달린 기사들은 어디 있었나 — 후사르가 '스웨덴 대홍수'를 막지 못한 4가지 이유

17세기 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날개 달린 기사들은 키르촐름과 클루시노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하며 유럽 최강의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반세기 뒤 '대홍수'라 불린 스웨덴의 침공 앞에서 후사르는 더 이상 기적을 만들지 못했다. 나라는 적에게 유린당했고, 국왕은 피신을 강요받았다. 대체 왜 날개 달린 기사들은 우리를 지키지 못했던 것일까?

'스웨덴 대홍수' 시기를 다룬 일부 출판물에서는 17세기 중반의 후사르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기병이었다고 주장한다. 화망을 두려워했고, 당시 기병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으며, 오히려 도보로 싸우는 스웨덴군이 더 현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프 본인조차 후사르의 위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1655년 말 그는 알렉산데르 힐라리 포우빈스키가 이끄는 후사르 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1656년 바르샤바 전투 이틀째에는 부하들에게 후사르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또한 연방 영토에서는 기병 없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연방은 극도로 광활하고 도시화가 덜 된 나라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스웨덴군도 이 사실을 점차 깨달았고, 대홍수 기간 동안 그들 군대 내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후자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날개 달린 기사들은 어디 있었나 — 후사르가  스웨덴 대홍수 를 막지 못한 4가지 이유

후사르를 재현한 역사 재연자. (CCA SA 3.0 라이선스, 사진: kdkirina5@mail.ru)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침공 기간 동안 후사르는 클루시노나 키르촐름 같은 대승을 전공책에 추가하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 후사르의 수가 너무 적었다

첫 번째 이유는 단적으로 숫자였다. 연방의 직업 군인은 자비로 장비를 갖춰야 했고, 생계는 늘 체불되던 군수 혹은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특히 후사르 소속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고비용 투자를 의미했다. 귀족층이 점점 가난해지면서 군인의 길을 택하는 이들은 값싼 부대를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연방은 1648년부터 타타르의 지원을 받는 코사크 반란과 오랫동안 씨름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654년에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후사르를 비롯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1652년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에게 당한 바토흐(Batoh) 전투의 참패는 치명적이었다. 코사크들은 동맹국으로부터 폴란드 포로를 돈주고 사들여 학살했고, 수천 명의 병사가 희생되었다. 그중에는 폴란드군 장교단의 꽃이라 할 인재들과 수많은 후사르가 포함되어 있었다.

날개 달린 기사들은 어디 있었나 — 후사르가  스웨덴 대홍수 를 막지 못한 4가지 이유

창을 들고 돌진하는 후사르.

그 결과 후사르의 열은 크게 줄어들었다. 역사학자 파베우 스코보로다는 대홍수 당시 후사르는 기껏해야 1,000기 남짓이었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연구자 안제이 A. 마예프스키의 계산으로는 1655~1659년 왕관군(폴란드군)의 후사르는 최대 1,108기, 리투아니아군은 1,020기에 그쳤다.

2. 창(코피아)이 부족했다

두 번째 문제는 창의 부족이었다. 이는 이미 17세기에 안제이 막시밀리안 프레드로가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후사르의 창이 있는 한 들판에는 폴란드인이 설 것이며, 창이 사라지면 폴란드인의 미덕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돌진 과정에서 수많은 창이 부러졌고, 원정 중에 그 빈자리를 메우는 일은 극도로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필수 장비 없이는 어떻게 싸워야 했을까? 군사역사가 미로스와프 나겔스키는 이렇게 기록했다. "창이 부족하자 후사르들은 후사르답게 창으로 돌진하는 대신, 이른바 '파테르나' 방식, 즉 권총을 손에 든 채 싸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지원 부대가 없었다

세 번째 이유는 후사르가 적과 교전할 때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사르가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추가 병력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하필 그 부대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날개 달린 기사들은 어디 있었나 — 후사르가  스웨덴 대홍수 를 막지 못한 4가지 이유

알렉산데르 오스트로프스키(1777–1832)가 그린 후사르.

병력 부족은 1656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당시 약 900~1,000명의 후사르가 세 개 열로 배치된 18,000명의 스웨덴-프로이센 연합군에 돌진했다. 그들은 제1열을 돌파하고 제2열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끝내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다른 깃발 아래 있던 폴란드 귀족 부대들이 후사르를 지원하라는 국왕 얀 카지미에시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겔스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국왕은 기수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하는 한편, 스스로 하사관요 군수장교요 평범한 병사 역할까지 자처하며 사브르를 손에 든 채 여기저기를 누볐다. 어떤 이에게는 호소하고, 어떤 이에게는 위협했으며, 때로는 그토록 다정하게 말해서 눈물을 흘리는 병사도 있었다.

절박했던 국왕은 비겁한 기수 중 하나의 머리 위로 팔검을 치켜들 뻔하기도 했다!

4. 스웨덴군은 전장을 잘 골랐다

네 번째 이유는 후사르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활짝 열린 평야였다는 점이다. 후사르 역사 전문가 라도스와프 시코라는 "돌진 경로의 장애물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후사르의 결연한 돌진을 좌절시킨 원인은 화기의 화력이 아니라 바로 그 장애물들이었다"라고 썼다.

지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656년 스웨덴군과 벌인 클레츠코(Kłecko) 전투가 잘 보여준다. 적군은 넓은 해자 뒤에 진을 쳤고, 후사르 기수의 여섯 차례 돌진조차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한 병사는 패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라고 요약했다.

궁극적으로 스웨덴 침략자를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은 '소모전'으로 판명되었다. 그 대가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였다. 군사역사가 로버트 I. 프로스트는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스웨덴인들은 이 전쟁에서 거의 모든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그것은 그들에게 큰 소득이 되지 못했다. 동유럽의 전쟁은 오히려 소규모 부대 간의 수많은 교전과 충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후사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돌파력을 지닌 기병이었다. 다만 숫자, 장비, 동료 부대의 지원, 그리고 지형이라는 조건이 모두 무너져 있었을 뿐이다. 대홍수의 참사는 날개 달린 기사들의 실패가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나라의 비극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