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중 한 명은 다리를 잃었고 넷은 중상을 입었지만, 이 이야기는 분명 하나의 기적이라 불릴 만하다. 대조국전쟁 기간 우크라이나 콜호스 농부 옙도키야 리센코의 열 아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모두가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 중 공식 집계에 따르면 2,800만 명의 소련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희생자 수가 4천만 명에 달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 가족이 여러 식구를 잃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소련 가정
리센코 가족은 어머니 옙도키야와 아버지 마카르, 그리고 16명의 자녀 — 아들 11명과 딸 5명 — 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체르카시 지역의 브로바치 마을에 살았다.
여러 면에서 리센코 가문의 운명은 수많은 소련 가정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1920년대 그들은 넉넉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집, 7헥타르의 논밭, 말, 양, 소가 있었다. 그러나 그 10년대 말 소련에서 집단화가 시작되면서 리센코 가문은 쿨라크로 분류되었다.
처음에는 콜호스 가입을 권유받았고, 가족이 거부하자 국가는 재산을 몰수한 뒤 인근 마을의 작은 집 하나를 내주었다. 자신과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마카르와 옙도키야는 결국 집단농장에 가입했다.
193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3년 후에는 극동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들 즈바투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쟁 – 영광과 비극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14세였던 막내 알렉산드르를 제외한 모든 형제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테오도시는 30살로 콜호스의 마부로 일했고, 스테판은 운전기사, 파벨은 양치기, 바실리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대장간에 취직해 있던 알렉산드르마저 한가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입대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미하일이 가장 먼저 전선에 나갔다.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는 빵을 구워 주고 고향 흙 한 줌을 쥐여 주었다 — 옙도키야는 훗날 모든 아들들을 이렇게 배웅했다고 전해진다.
미하일은 보병 부대에서 싸웠고, 유명한 코르순 포위전에 투입되었으며,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파시스트 사령부를 불태운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카니우 근처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에 성공했고, 아군 진영에 도착한 뒤 병원에 수용되었다. 1944년 회복된 그는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1944년 8월 야시-키시뇨프 작전 중 미하일은 형 테오도시를 만나게 된다. 정찰 임무를 앞두고 몇몇 동료와 함께 이동하던 그는 참호에 앉아 있는 테오도시를 발견했다. 그는 참호로 달려가 뛰어내려 형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피로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 미하일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전쟁 종반 무렵 미하일은 헝가리에 있었다. 불행히도 그때 가슴에 중상을 입었고, 영광 훈장을 받아 장애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테오도시는 더 불행했는데,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다리가 잘린 순간을 기억한다. 전장에서 실려 나왔고, 나는 고통과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의사가 다가와 말했다. "왜 소리를 지르나? 다리가 없어도 살고 일할 수 있습니다. 방금 눈을 잃은 병사가 있는데, 그가 울 권리가 있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정말 누군가는 더 힘들구나. 나는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았다. (…) 그 후 나는 단 한 번만 울었다. 다리 없이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흐느끼며 나를 끌어안았을 때였다."
전선에 있었던 기간이 가장 짧았던 것은 니콜라이로, 겨우 한 달이었다. 젊은이는 다리에 중상을 입었고, 입원 치료 후 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안드레이가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당했으나 탈출해 붉은 군대에 합류했고, 오늘날의 몰도바에서 부상을 입은 뒤 1944년 귀향했다.
파벨 역시 강제 징용으로 독일에 끌려갔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병사들에게 해방된 그는 소련 부대 중 하나에 자원해 합류했다. 스테판의 전차는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불탔고, 이후 그는 동프로이센에서 크게 다쳤다. 치료를 마친 뒤에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대일전에 참전했다.
어머니 동상 앞에 선 아들들. 사진: 유리 로스트
소대 부소관이었던 알렉산드르는 베를린까지 진격한 유일한 형제로, 국회의사당 벽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그는 독일 수도에서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날 그와 부하들이 빵과 통째로 된 고기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른 독일 소녀가 나타나 굶주린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산드르는 소녀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병사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부하들은 분개했다. "중대장님,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고요?!"
에필로그
흥미롭게도 아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올 때, 옙도키야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형제들이 전쟁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야위고, 늙어 보이고, 수염이 뒤덮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곧 각자 아내를 찾았다. 딸들도 모두 출가했다. 옙도키야는 손주 36명을 둔 할머니가 되었다!
이윽고 전쟁 영웅 열 형제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가족의 소식이 키예프까지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이 여성에게 '모친 영웅' 금성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키예프에 초대받았을 때 옙도키야는 겁에 질렸는데, 그녀는 군청 소재지조차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화국 수도 방문은 그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수상식에서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당 간부들이 베푼 예우를 잊지 못했다.
옙도키야 리센코에게 '모친 영웅' 칭호를 수여하겠다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포고문
옙도키야는 1967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뒤 인기 신문 《문학 신문》에 모친 영웅에 대한 기사와 열 아들의 사진이 실렸다. 집필자 유리 로스트는 리센코 부인의 동상 건립을 호소했고, 1984년 동상이 제막되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바실리를 제외한 옙도키야의 모든 자녀가 행사에 참석했으며, 기념비 주변에는 그녀의 모든 자녀를 기리는 15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마을 학교 건물에는 리센코 가족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형제들의 군용 외투, 군화 9켤레, 그리고 테오도시의 부츠 한 질이 전시되어 있다. 방문객을 안내하는 사람은 옙도키야의 증손녀 야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