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그단스크 기차역 공격: 바르샤바 봉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순간

바르샤바 봉기의 가장 비극적인 국면 중 하나였다. 적의 압도적 우세, 심각한 무기 부족, 지휘부의 치명적 실수로 인해 1944년 8월 20/21일 밤과 21/22일 밤 그단스크 기차역에 대한 공격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들은 점령군과 끝까지 싸웠다.

바르샤바 봉기는 전투에 대한 열정과 자유에 대한 비전만으로는 병사들이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수의 잘 무장한 독일군이 주둔하던 그단스크 기차역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역은 구시가지와 조리보르츠(Żoliborz)의 국내군(Armia Krajowa) 부대를 가로막는 일종의 장벽이었다. 안타깝게도 야간 공격의 유일한 결과는 막대한 인명 손실이었다...

처음부터 기울어진 승부

독일군은 기차역과 철도선을 따라 포병과 장갑열차의 지원을 받으며 매우 강력한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 침공 이후 바르샤바는 동부 전선 전방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 요충지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국내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실제 병력과 전투 능력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단스크 기차역 공격: 바르샤바 봉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순간

그단스크 기차역은 구시가지와 조리보르츠의 국내군 부대를 분리하는 장벽 역할을 했다.

여러 추산에 따르면, 훈련되지 않고 무장이 빈약한 1,000명 미만에서 1,5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자신들의 지휘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점령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보이치에흐 브란스키(Wojciech Brański)의 책 『옝드레크 '44(Jędrek '44)』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무기와 탄약은 봉기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었고, 음식이나 옷, 연인보다 더 중요했다. (...) 대개 수류탄을 들고 전투에 참여한 뒤에야 무기를 받을 수 있었는데, 수류탄은 소총보다 많았다. 아니면 죽은 독일군이나... 전사한 동료의 시신에서 무기를 거두어야 했다.

캄피노스(Kampinos) 숲에서 조리보르츠로 이동한 알폰스 코토프스키(Alfons Kotowski) "오콘(Okoń)" 소령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는 장비 면에서는 약간 나았지만, 여전히 훈련이 부족했고 바르샤바 지리에 어두워 길을 잃곤 했다. 야간 행군은 끝없이 이어졌고, 부대 간 통신도 열악했다. 마침내 전투 개시 시점이 다가왔을 때, 병사들은 밤새 방황하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호미로 해를 가리기

국내군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첫 번째 공격은 8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에 걸쳐 시작되었다. 계획에 따르면 공격 부대는 텃밭을 지나 약 300미터 구간을 통과한 뒤, 녹지대와 철도를 가르는 완만한 경사면을 올라야 했다. 도중에 일부 부대는 불탄 병영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지휘부가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드러났다.

봉기군 에드워드 보나로프스키(Edward Bonarowski)는 이렇게 회상했다:

불탄 병영 일대에는 독일 보병이 대기하고 있었고, 텃밭은 포격으로 뒤덮였다. 시타델라(Cytadela), 부라쿠프(Buraków), 스워도비에츠(Słodowiec), 화학연구소, 인플란츠카 거리(Inflancka)에서 쏘아진 포탄이었다. 포격선을 넘어 병영과 철도 위 경사면으로 뛰어든 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전에 전혀 파악되지 않았던 기관총 진지였다.

그단스크 기차역 공격: 바르샤바 봉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순간

이 글은 벨로나(Bellona) 출판사에서 최근 출간된 보이치에흐 브란스키의 『옝드레크 '44』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는 당시 소대장들은 지휘관 회의에서 철도 너머에는 적이 없다고 확언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철도를 따라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가 완벽한 띠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부대는 철도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의 방어가 너무 강력하고 손실이 너무 커서 조리보르츠 부대의 두 번째 돌격은 전투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독일군은 조명탄으로 전장을 밝힌 뒤, 안전한 벙커 안에서 중기관총과 유탄발사기로 봉기군을 제압 사격했다.

전투라기엔 흉내 내기

다음 날 밤, 공격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봉기군이 철도 반대편까지 돌파해 구시가지와 무라누프(Muranów) 방면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단스크 기차역 점령을 위한 국내군의 마지막 성과였다. 신호 전달의 오류와 한층 더 격렬해진 독일군의 반격(이번에는 장갑열차까지 투입)으로 폴란드 측은 첫날보다 더 큰 손실을 입었다.

한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 보나로프스키는 이렇게 평했다:

전투의 패러디였다! 경기관총으로는 중기관총에 맞서고, 유탄발사기로는 길게 늘어선 장갑열차에 맞섰다. 연발 소총인 소련제 소총도 발사되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목적으로? 무작정? 독일군을 겁주려고?

그단스크 기차역 공격: 바르샤바 봉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순간

실패의 책임은 대중적 인기가 없던 알폰스 코토프스키 "오콘" 소령에게 돌려졌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그단스크 기차역 점령 시도의 마지막이었다. 8월 22일 아침, 타데우시 펠친스키(Tadeusz Pełczyński) "그제고시(Grzegorz)" 장군은 카롤 지엠스키(Karol Ziemski) "바흐노프스키(Wachnowski)" 대령에게 공격 재개가 가능하다고 통보하면서도, 동시에 구시가지를 지원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제안했다. 결국 공격 포기가 결정되었고, 실패의 책임은 캄피노스(이른바 '숲') 부대 지원 임무를 맡았던 인기 없는 알폰스 코토프스키 "오콘" 소령에게 전가되었다.

전투에 투입된 1,300명의 병사 중 약 500~6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 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약 50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