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인도의 자존심, 아랍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왕 바파 라왈

바파 라왈(Bappa Rawal)은 인도 라자스탄 메와르 지역의 진정한 건국자로, 아랍 세력의 동방 침공을 저지한 전설적인 힌두 왕입니다. 그가 어떻게 한낱 소년에서 위대한 황제로 성장했는지, 그리고 그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려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현 하리트 리시와의 운명적 만남

어느 마을에 매일 젖 짜는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암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우유를 얻지 못해 종종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한 소년은 어느 날 결심하고 암소를 따라갔습니다. 놀랍게도 암소는 한 성자의 수행원(아쉬람)으로 들어가 신령한 시브링가(Shivling)에 자신의 젖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경악하며 바라보던 소년 뒤에서 미소 짓는 성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리트 리시(Harit Rishi)'였습니다. 이 소년이야말로 훗날 바파 라왈이라 불리게 될 인물이었습니다. 하리트 리시는 소년에게 입문식을 거행했고, 그의 가르침 덕분에 소년은 훗날 메와르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통치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메와르의 진정한 건국자

구힐(Guhil) 혹은 게홀트(Gehlot) 왕조 출신인 바파 라왈은 메와르의 실질적 창건자로 여겨집니다. 메와르가 누린 강대함, 명성, 존경은 모두 그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왕조에서 시소디아(Sisodia) 왕조가 갈라져 나왔으며, 이후 라나 쿰바(Rana Kumbha), 라나 상가(Rana Sanga), 마하라나 프라탑(Maharana Pratap)과 같은 위대한 왕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바파 라왈은 화려한 이름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는 애국심과 헌신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아버지'라는 뜻의 '바파(Bappa)'라는 칭호로 추앙했습니다. 각종 찬양비와 비문에서도 그는 반복적으로 '라구밴시(Raghuvanshi, 라마 왕조의 후손)'로 불렸습니다.

그는 메와르 나그다(Nagda)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본명이 칼보즈(Kalbhoj)였다고 보지만, 일부는 다른 이름으로 기록합니다. 출신에 대해서도 학설이 분분하지만, 그의 행적이 분명 크샤트리야(전사 계급)의 것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라왈(Rawal)'이라는 칭호는 빌(Bhil) 부족의 추장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바파 라왈이 겨우 3살이던 무렵, 그와 어머니는 무연고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빌 공동체가 두 모자를 도와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바파 라왈의 유년기는 빌 부족과 함께 보내졌습니다. 훗날 아랍과의 전쟁에서도 빌 공동체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장군에서 황제로

바파 라왈은 처음에 칫토르(Chittor) 마우리아(Maurya) 통치자 휘하의 장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행적은 신드(Sindh)의 공식 역사서인 『차크나마(Chachnama)』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다히르(Dahir) 왕의 아들 자이센(Jaysen)과 그의 어머니 라니 라디 데비가 칫토르에 원조를 요청하러 왔고, 마우리아 통치자는 장군 바파 라왈에게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메와르의 마우리아 통치자 만모리(Manmori)는 아랍과의 싸움에 무관심하거나 역부족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때 하리트 리시가 비밀 보물고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그곳에서 약 1억 5천만 닢의 금화가 나왔습니다. 바파는 이 보물로 군사 조직을 만들었고, 인도 국경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를 방해하던 만모리를 제거(혹은 격퇴)하고 칫토르 요새를 손에 넣은 그는 무려 127만 2천의 병력을 거느린 거대한 군사 조직을 구축했습니다.

마하데바의 열성적 신도

인도의 자존심, 아랍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왕 바파 라왈

하리트 리시의 축복 아래 바파는 시바 신(마하데바)의 깊은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몸소 달려가 그 땅을 다시 산아타나(영원한 법)의 품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서기 734년, 그는 우다이푸르 북쪽 카일라슈푸리에 에클링지(Eklingji) 신전을 세웠으며, 이 신전은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근처에는 하리트 리시의 수행원이 있으며, 그는 또한 에클링지 신전 뒤편에 아디 바라하(Aadi Varaha) 신전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파키스탄의 도시 라왈핀디(Rawalpindi)의 이름이 바파 라왈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아랍 침략자에 맞선 연합 전선

바파 라왈은 구르자라-프라티하라(Gurjara-Pratihara)의 황제 나가바타 1세(Nagabhatta I), 찰루키아(Chalukya) 왕조의 비크라마디티야 2세(Vikramaditya II)와 함께 연합하여 아랍 세력에 맞섰습니다. 황제 나가바타가 서부 라자스탄과 말와(Malwa) 지역에서 아랍인을 몰아냈다면, 바파는 메와르와 신드 지역에서 같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723년, 칼리프(Caliphate)의 대표로 알 주나이드(Al Junaid)가 인도를 침공했을 때, 바파 라왈이 이끄는 연합군은 주나이드의 군대를 격파하고 나아가 알로르(Alor)까지 정복했습니다. 패배한 주나이드는 카슈미르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당시 통치자 라리타디티아 묵타피다(Lalitaditya Muktapida)에게 패사했습니다. 알 하캄 빈 알와, 타밈 빈 자이드 울 우트비, 압둘라만 알 무리 등 아랍 장군들의 군대가 연달아 궤멸당하면서, 이후 이슬람 정복자들은 바파 라왈의 이름만 들어도 전율했다고 전해집니다.

가즈니까지 진격한 무적의 정복자

바파 라왈은 찰루키아 황제 비크라마디티야 2세의 장군 아브니자나슈레이 풀라케신(Avnijanashray Pulakeshi)과 함께 아랍령까지 진격, 가즈니(Ghazni)까지 공격해 올라갔습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가즈니의 통치자 살림(Salim)을 대파했고, 살림의 목숨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그의 딸 마이야와 결혼했습니다. 이후 그는 조카를 그곳 왕위에 앉혔습니다.

바파의 세력은 간다라(Gandhara), 투란(Turan), 호라산(Khorasan), 이란(Iran)까지 뻗어갔고, 그곳에 힌두의 지배를 확립했습니다. 그의 위명에 눌려 무려 18명의 무슬림 통치자들이 자신의 딸들을 그에게 시집보냈다고 합니다.

이후 인도 통치자들은 당시 브라만바드(Brahmanabad, 현 카라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 체제를 세웠습니다. 검에 굴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크샤트리야들을 다시 힌두로 되돌리며 이 땅에 새로운 라지푸트(Rajput) 왕조가 탄생했고,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파키스탄 신드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736년 알 하킴(Al-Hakim)이 인도를 침공했을 때, 바파 라왈은 무슬림 침략자들을 완벽히 분쇄했습니다. 이 승리로 이후 300년간 어떠한 이슬람 침략자도 인도 침공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칼리프의 지배 아래 인도를 넣겠다는 꿈을 꾸던 알 하킴은 바파 라왈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으며, 이 기록은 빈말(Bhinmal) 비문에서 확인됩니다. 739년 나브사리(Navsari) 비문에 따르면 카첼라, 샌드하브, 사우라슈트라, 카르코타카, 마우리아, 구르자르 군대가 힘을 합쳐 무슬림 군대를 격파했다는 증거도 남아 있습니다.

바파 라왈이 발행한 주화

인도의 자존심, 아랍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왕 바파 라왈

바파 라왈은 자신만의 특별한 주화를 발행했습니다. 이 주화의 왼쪽에는 삼지창(트리슐)이, 오른쪽 제단 위에는 시브링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시브링가를 향해 난디(Nandi, 시바의 탈것)가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예배하는 사람의 형상과 함께 '보파(Boppa)'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태양과 채양(차트라)의 문양이 있는데, 이는 수리아밴시(태양 왕조) 출신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아래쪽에는 오른쪽을 향해 선 암소와 젖을 먹는 송아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상징들은 바파 라왈의 시바 신앙과 그의 삶의 일화들을 반영합니다.

역사학자들이 평가한 바파 라왈

토드 대령(Colonel Tod)은 저서 『라자스탄 연보(Annals)』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백 명의 왕을 배출한 왕조의 창시자 보파는 군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범인을 초월한 존재로 숭배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한다. 메와르에서 그의 비범한 행운의 근원을 의심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Tod, Annals, Pg. 184)

역사학자 C.V. 바이디야(CV Vaidya)는 평했습니다. "메와르 왕조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바파 라왈은 인도의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다. 그의 용맹이라는 바위에 동쪽으로 밀려온 아랍 정복의 물결이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시바지와 마찬가지로 바파 라왈은 독실한 종교인이었으며, 소를 잡는 자들이었던 인도의 새로운 침략자들을 똑같이 증오했다." (History of Medieval Hindu, Vol-II, pg. 72-73)

역사학자 카비라지 샤얄 다스(Kaviraj Shyamal Das)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파가 인도의 위엄 있고 강대하며 눈부신 마하라자디라자(대왕 중의 대왕)가 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선조들의 위엄, 고결함, 무용을 재현했다."

가우리샹카르 히라찬드 오흐자(Gaurishankar Hirachand Ojha)는 말했습니다. "바파는 독립적이고 위엄 있으며 광대한 왕국의 주인이었다. 바파는 단연코 라자스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은퇴와 최후

753년, 바파 라왈은 왕권을 아들에게 넘기고 은퇴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에클링푸리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나그다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파 라왈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왕의 삶을 넘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인도 역사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