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1947년 8월 14일, 영국령 인도 제국은 광대한 인도 아대륙을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했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독특한 국가였습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폭이 약 1,600km에 달하는 인도라는 나라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파키스탄은 무슬림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슬람의 이름으로 세워진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1973년 헌법에서 국호를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경하도록 주장했고, 1973년 헌법의 설계자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보수 세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 개정안을 수용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아흐마디야 교도들을 비무슬림으로 규정하는 조항이 헌법에 명시되었는데, 이는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파키스탄 정치와 헌법의 아픈 역사를 짚어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1947년 이후의 시기를 다루므로, 인도 분할에 관한 배경은 생략하겠습니다.

1947년 이후: 건국의 이상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무함마드 알리 지나는 1947년 8월 11일 제헌 의회에서 포괄적인 연설을 통해 파키스탄이 신정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여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연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파키스탄 국가 안에서 여러분은 자유롭게 사원으로 갈 수 있고, 모스크로 갈 수 있으며, 그 밖의 어떤 예배 장소로든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교, 카스트, 신념에 속해 있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활동과 무관합니다. 우리는 이를 이상으로 삼아야 하며, 시간이 지나면 힌두교도는 더 이상 종교적 의미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의미에서 힌두교도가 되고, 무슬림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원래 파키스탄의 국기는 전부 초록색이었으나, 지나는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을 상징하기 위해 깃발의 20%를 흰색으로 채우도록 했습니다. 리아카트 알리 칸은 8월 11일 의회에서 국기를 게양했으며, 파키스탄의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헌법 제정의 실패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지나는 '파키스탄'이라는 근대 국가의 기초를 놓기에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키스탄의 초대 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리아카트 알리 칸도 헌법 제정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51년 10월 16일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인도는 성숙한 지도력 덕분에 이미 1949년에 헌법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리아카트가 남긴 것은 1949년의 '목표 결의안(Objectives Resolution)'뿐이었는데, 이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헌법으로 통하는 관문에 불과했습니다. 목표 결의안은 실질적 내용이 없는 선언문에 가까웠습니다. 그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의 주권이 국민이 아닌 알라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리아카트는 라왈핀디의 리아카트 바그에서 암살되었고,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못했습니다. 누가 리아카트를 살해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파키스탄은 1956년까지 헌법 없이 존속했습니다. 1956년 헌법은 연방제 성격을 띠었으며, 일부 사항은 연방 목록에, 일부는 주 목록에, 일부는 공동 목록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목록 구조는 1973년 헌법에도 이어졌으나, 현재는 공동 목록의 모든 사항이 연방 또는 주 목록에 흡수되면서 공동 목록 자체는 삭제되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불안정은 극심했습니다. 대통령 이스칸데르 미르자는 1955년까지 무려 네 명의 총리를 해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참모총장이었던 아유브 칸이 1958년 10월 8일 미르자 정부를 전복시켰고, 미르자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1956년 헌법을 폐지했습니다.

'필요성 원칙(Doctrine of Necessity)'의 저주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이것은 파키스탄의 정치·헌법 체계에 가해진 또 하나의 타격이었습니다. 대통령 시칸다르 미르자가 1955년 국민의회를 해산하자, 국회의장 물비 타미즈딘은 이 결정을 대법원에 제소했습니다. 그러나 악명 높은 판사 무니르는 '필요성 원칙'을 근거로 해산 결정을 정당화했습니다.

이 필요성 원칙은 국가 법체계의 실질을 훼손했으며, 이후에도 군사 쿠데타와 계엄령을 정당화하는 데 여러 차례 악용되었습니다. 정치 체제의 취약성 속에서 아유브 칸은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1962년 새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헌법은 단일 입법부를 둔 대통령제 형태였습니다. 그는 모든 의회제 국가의 관례에 반하여 서파키스탄을 '단일 통합 단위(West Pakistan One Unit)'로 선언했는데, 이는 벵골인의 인구적 우위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조치의 이면에는 벵골인에 대한 열등감 어린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본 민주주의(Basic Democracies)와 1962년 선거

1962년 헌법에 따라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선거인단은 8만 명 규모의 기본 민주주의 위원회였습니다. 아유브의 경쟁자는 지나의 유일한 여동생인 파티마 지나였지만, 아유브는 선거를 조작하고 당선되었습니다.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외국에서 유학한 외교관 출신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30세의 나이로 최연소 외무장관이 되었고 아유브 칸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부토는 아유브에 맞선 운동을 벌였습니다. 1962년 헌법상 아유브는 최고 행정권자로서 사임하기 전 상원의장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신념을 넘어 자신의 군 사령관인 야히야 칸에게 권력을 넘겨버렸습니다. 이것은 파키스탄 정치·법 체계에 저질러진 또 하나의 잘못이었습니다.

1970년 총선은 파키스탄 정치사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고 공정했던(보통선거권 기반의) 선거였습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파키스탄 인민당(PPP)이 서파키스탄에서 승리했고,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에서 압승했습니다. 동파키스탄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에 무지부르 라흐만이 통일 파키스탄의 총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야히야 칸 역시 '열등한 벵골인'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야히야는 동파키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명령했습니다. 참고로 무지부르 라흐만이 제시한 6개항 요구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지부르의 6개항은 연방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분리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무지부르는 사실상(de facto) 자신들의 나라를 원했던 것입니다.

1971년 인도와의 전쟁 이후, 당시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토는 계엄 하의 민간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1973년, 부토는 생애의 큰 업적을 남깁니다. 양원제 입법부를 갖춘 1973년 헌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전원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의원이 만장일치로 서명했습니다. 하원인 국민의회는 직접 선출된 272석에 여성 예비 의석 60석, 소수민족 예비 의석 10석을 더한 구성이었고, 상원은 주 간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해 연방 구성 단위에 동수의 의석을 배정했습니다.

부토의 역할: 민주주의자이자 원자력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문자 그대로이자 정신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자였습니다. 1970년 선거가 파키스탄 정치·헌법 역사상 가장 투명한 선거였던 만큼, 부토는 국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정당한 위임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도가 1974년 포크란에서 핵실험을 감행하자 부토는 이 조치가 아대륙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부토는 중파 관계 강화와 함께 '파키스탄의 핵 보유'라는 사명에 착수했습니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부토와 친분이 있었다)은 "우리(미국)는 너희(파키스탄)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경고했고, 부토는 "우리는 풀을 먹더라도 원자폭탄을 만들겠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훌륭한 민주주의자였던 부토였지만, 부하 선택에는 매우 신중했습니다.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온순한 인물로 평가된 지아울하크 장군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핵 프로그램이 진전되면서 부토는 이슬람권 연합 구축에도 나섰고, 미국의 눈에 그는 점점 '제멋대로'가 되어갔습니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지아는 1977년 7월 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토를 투옥했습니다. 그는 부토에게 극단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90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90일'은 11년으로 늘어졌고, 지아는 CIA와 모사드가 배후라고 알려진 사고로 비행기 추락사를 당할 때까지 집권했습니다. 부토처럼 지아 역시 '제 멋대로'가 된 셈입니다.

지아는 종교적 광신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핵 프로그램을 은밀히 계속 추진하며 미국을 속였습니다. 1988년, 모사드와 CIA가 지아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지아는 1977년 1973년 헌법을 폐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깨고 1979년 7월 4일 부토를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1985년에는 무소속(비정당) 선거를 실시해 11년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눈가림에 불과한 쇼를 벌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헌법에 제58조 2항 (b)를 추가한 일입니다. 이 조항은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국회와 주의회를 해산할 수 있게 했으며, 지아는 이를 이용해 1985년 무함마드 칸 주네호 총리의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이 조항의 존재는 육군참모총장(COAS) 출신 대통령을 절대 권력자로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 정치의 암흑기

지아의 정적은 줄피카르 알리 부토(파키스탄 인민당 창당자)의 딸 베나지르 부토였습니다. 베나지르는 망명 생활을 거친 뒤 1986년 4월 파키스탄으로 귀환했습니다. 지아는 1988년 11월로 선거일을 정했습니다. 정보기관(ISI) 국장 하미드 굴 장군은 파키스탄 인민당(PPP)에 맞서기 위해 이슬람 민주 연합(IJI) 결성을 지휘했습니다. 또한 PPP의 거점인 신드 주를 견제하기 위해 무하지르 카우미 운동(MQM)을 지아가 보호했는데, MQM의 지도자 알타프 후세인은 지금은 반역자로 규정된 인물입니다. 흥미롭게도 지아는 선거일을 베나지르의 임신·출산 시기와 겹치도록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베나지르는 대통령(언제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굴람 이샤크 칸과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8년 11월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정부는 부패와 족벌주의 혐의로 1990년 8월 6일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어진 1990년대는 파키스탄 정치사의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베나지르의 PPP와 나와즈 샤리프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PML)이 계속해서 '음악 의자 게임'을 벌이는 가운데, 10년 내내 불안이 이어졌습니다. 민주주의의 모든 원칙은 무시되었습니다. 나와즈 샤리프는 고(故) 지아울하크의 제자이자 군부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내부 분쟁으로 10년 전체가 낭비되었고, 어떤 정부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으며, 이 모든 사건 속에 헌법은 방치되었습니다.

이 권력 게임에서 가장 더러운 역할을 한 것은 군부였습니다. 국경을 수비하는 전문가로서의 역할 대신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나지르 총리 재직 시절, 어떤 장군도 여성 지도자에게 경례하기를 원치 않아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베나지르의 남편이자 신드 주 나와브샤 출신의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모든 개발 사업에서 뒷수습(리베이트)을 받는 것으로 유명해 '미스터 10%'라는 멸칭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위해 한 좋은 일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제58조 2항 (b)에 따른 해산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의 역할은 4개월 유효한 법령을 발포할 수 있는 국가원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마란 칸 니아지는 새로운 정당 파키스탄 테레크에 인사프(PTI)를 창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석 하나만 확보했지만, 이마란 칸은 정직한 정치인으로서 파키스탄 총리 자리까지 올라갔고, 펀자브, 카이베르파크툰크와, 발루치스탄에서 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드는 PPP가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주입니다. 베나지르 부토 암살 이후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가 당 대표가 되었고,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공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결론: 긴 여정의 시작

파키스탄 정치·헌법의 격동의 역사: 건국부터 현재까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파키스탄의 과거와 현재의 정치·헌법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역사에서 74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를 서구의 민주주의와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서구 민주주의도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수 세기가 걸렸습니다. 제1차·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파키스탄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낙관적으로 볼 때, 파키스탄은 이러한 문제들을 헤쳐나가 세계 무대에서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 이미지 출처: TRT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