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여성에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결혼 외에 유일하게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물론 모든 여성이 자유의지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신앙이든 강제든, 수도원의 높은 담장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중세 수도원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지어졌다. 높은 담장이 넓은 부지를 두르고 있었고, 그 안에는 정원과 과수원, 양어장, 그리고 마구간·곡창·빵집·맥주공방·제분소·비둘기집 같은 목조 농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부지의 중심에는 안뜰을 둘러싼 주요 건물들이 자리했다. 교회와 수도원 건물, 진료소, 부엌을 갖춘 식당(레펙토리움), 수녀들이 잠드는 기숙사, 회의가 열리던 장회실, 원장의 거처, 때로는 방문객을 위한 여관까지였다.
수도원의 위계 질서
수녀 공동체는 원장(아베스)이 이끌었다. 규모가 작은 공동체에서는 원장 수녀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가장 중요한 임무는 수도원 안의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종신직으로, 본인이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무능 또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해임되지 않는 한 평생 지속되었다.
원장 아래에는 일상 업무를 책임지고 수도원 생활을 관리하며 장부를 기록하고 하인들의 일을 감독하는 보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동체의 연장자들 가운데서 선발되었다. 수도원 위계의 정점에는 원장 수녀, 그리고 그의 대리인과 재무 담당자가 있었고, 구체적인 여러 직무는 보좌자들에게 맡겨졌다.
성가대장은 예배 중 노래를 이끌었다. 성구 관리인은 전례 의복과 제대보, 성유물함을 돌보았고, 밀랍과 수지, 심지를 구입하며 초장이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한 수녀는 의자와 탁자, 옷, 그릇을 수선하고 식탁 차림을 감독했으며 세수대를 청결하게 유지했다.

수도원의 닫힌 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항상 바깥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만능 수녀는 기부금을 관리했다. 시녀장은 옷과 침구의 재봉, 수선, 세탁을 지시했다. 수도원 청지기는 식량을 관장하고 흔히 수도원 농장까지 운영했다. 요리장은 배급 담당자의 감독 아래 요리를 지휘했고, 간호 수녀는 환자를 돌보았으며, 수련원장은 수련 수녀들을 지도하고 훈육했다.
여성 수도회는 최소 한 명의 사목 사제를 두었는데, 이들은 수녀원 밖에 거주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고해를 들었다. 때로는 수도회의 재정 업무까지 관리하기도 했다.
엄격하게 정해진 하루 일과
남녀를 막론한 모든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일과표는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기도, 노동, 독서에 할애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세 시간마다 드리는 기도가 하루의 분위기와 리듬을 이끌었다.
수녀들은 계절에 따라 새벽 6시나 7시에 일어나 제1시 기도에 참여했다. 다른 시간 전례와 마찬가지로 시편 연송, 짧은 기도, 그리고 소위 '응답'으로 이루어진 예식이었다.

중세에서 가장 유명한 수녀 중 한 명은 바로 빙엔의 힐데가르드였다.
빵에 포도주, 맥주 또는 물을 곁들인 아침 식사 후, 공동체는 수도원 동익의 장회실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곳에서 지대와 임대, 토지나 목재 판매, 보조금 등 여러 안건이 논의되었고, 승인된 문서에는 수도회 인장이 찍혔다. 이후 윤리적·영적 문제가 다뤄졌다. 잘못을 저지른 수녀들은 여러 비행을 자백하거나 고발을 들었고, 보속이나 회초리로 이루어지는 체벌을 받곤 했다.
정오가 되면 수녀들은 무리 지어 식당으로 갔다. 그중 한 명이 성경 구절이나 교부들의 저작을 낭독하는 동안 나머지는 채소, 빵, 과일, 때로는 생선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고기는 오직 진료소에서만 제공되었지만, 이것이 몇몇 남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점심 후의 시간은 노동에 바쳐졌다.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라고 성 베네딕토는 말하며 하루 여섯 시간의 육체노동을 권했다. 당시에는 밭일, 물레질과 베틀질, 혹은 집안일로 이루어졌다. 6세기 푸아티에 성십자가 수녀원의 수녀이던 라데군드 왕비는 쓰레기를 치우고, 물과 장작을 나르고, 화덕에 불을 지피고, 쓸고, 요리하고, 설거지와 세탁까지 도맡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후기 중세의 귀족 출신 수녀들은 이런 의무를 기피했다. 거의 모든 여성 수도원은 요리사, 하녀, 잡역부를 고용했고, 큰 공동체는 통상 집사, 양조 담당자, 제빵사, 맥아 제조자, 우유 배급 담당, 가정부, 세탁부까지 두었다. 일부 수녀는 개인 시녀까지 거느렸다. 따라서 수녀들의 노동은 자수 같은 활동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 노동이 끝나면 수녀들은 저녁 식사를 했다. 역시 성경 낭독이 함께 이루어졌고, 완전한 예배를 마친 뒤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들은 옷을 입은 채 공용 방에서, 낮은 칸막이로 구분된 작은 칸에서 잠을 잤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베네딕트회의 수행은 두 가지 기본 원칙, 즉 공동생활과 청빈에 기반했다. 기도, 노동, 식사, 수면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수녀들은 개인 소유물, 돈, 가구, 보석을 지닐 수 없었다.
옷은 수도회 공용 창고에서 가져왔고, 새 옷을 받으면 헌 옷은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조금이라도 사적인 공간을 갖고 싶다는 그리움, 무언가 자기 것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끊임없이 드러났다. 주교의 시찰은 공동체와 청빈 원칙의 끊임없는 위반 사례를 적발하는 자리가 되곤 했다.
여성 수도생활의 또 다른 어려운 과제는 고립된 삶이었다. 여성이 유혹에 특히 약하다는 당시의 편견 때문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바깥세상과의 접촉은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스캔들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엄격한 폐쇄를 강제하기 위한 교령과 개혁이 수시로 시행되었지만, 이런 권고는 수도 공동체의 수입 확보와 수도원 운영이라는 필요, 그리고 수녀들이 가족 및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과 자주 충돌했다.
주교들의 교령과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녀들은 가끔 수도원을 떠날 핑계를 늘 찾아냈다. 대체로 수도원 농장에서 재배하거나 생산할 수 없는 물품, 즉 소금과 생선, 솥, 못, 비누, 양피지, 향신료를 구입하기 위한 도시나 시장 출장은 허용되었다.

그렇다면 수녀들의 삶은 고된 노동으로만 가득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바깥세상은 또한 수도원 안으로 스며들었다. 기숙사, 식당, 진료소, 장회실, 회랑에 출입하는 것은 이론상 수도원 밖 사람들에게 금지되었으며, 머무는 경우라도 낮 시간으로 제한되고 면담 규정을 따라야 했다.
이런 규칙은 문자 그대로의 계율보다 집행하기가 더 어려웠다. 수녀들의 친구와 친척은 수녀원 건물에 들어올 수 없었고, 하인과 다른 평신도가 기숙사에 숙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여성 수도회의 정결 서원 위반은 대개 호전적이고 악의적인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이 보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발생하여 주교 시찰 문서에 기록된 사례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비행은 놀랄 만큼 드물었다.
출처
위 글은 프랜시스 & 조지프 기스 저 『중세 여성의 삶』(즈낙 호리존트 출판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제목, 리드, 삽화와 캡션, 굵은 글씨, 소제목은 편집국이 붙였으며, 본문은 가독성을 위해 단락 구분 등 기본적인 편집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