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가 황제가 됨:서기 37년 3월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칼리굴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조카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새로운 로마 황제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칼리굴라의 초기 통치:칼리굴라의 통치는 대중의 지지와 로마 군대와 국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세금 감면, 곡물 보조금 분배, 정교한 공개 행사 조직과 같은 포퓰리즘 조치를 도입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유언장과 근위대: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유언장에서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모두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칼리굴라는 제국의 정예 경호원인 근위대의 지원을 확보했습니다. Praetorian Prefect Macro는 Caligula를 유일한 황제로 확립하고 Tiberius가 죽은 직후 Gemellus를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했습니다.
아그리피나의 음모: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인 장로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네로 카이사르를 왕좌에 앉히려는 음모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이 음모를 발견하고 아그리피나를 판다테리아 섬으로 추방하고 네로와 그의 두 형제를 처형했습니다.
게르마니쿠스의 승리와 개선문:서기 37년, 칼리굴라는 수년 전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거둔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에서 대승리 행렬을 조직했습니다. 그는 포럼 로마눔(Forum Romanum)에서 게르마니쿠스 개선문(Arch of Germanicus)을 그의 아버지에게 헌정했습니다.
건설 프로젝트:칼리굴라는 로마 포럼의 개조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 건설을 포함한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칼리굴라의 기이함:통치 초기부터 칼리굴라는 과도한 지출, 파격적인 행동, 관습과 전통에 대한 무시 등 충동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유대인 대표단: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가 이끄는 유대인 대표단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총독이 취한 탄압적인 조치에 대해 항소하기 위해 로마의 칼리굴라를 방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