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조약 개정의 주역! 코무라 주타로의 경력이 너무 대단하다는 것에 대해

조약 개정의 주역! 코무라 주타로의 경력이 너무 대단하다는 것에 대해

"코무라 주타로요? 아, 그 조약 개정한 사람이죠?"

코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라는 이름을 들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일본사에 그리 밝은 편은 아니어서 똑같은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미야자키현 오비시에 있는 '코무라 주타로 기념관'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하나씩 짚어보면, 왜 그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꼽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코무라 주타로의 놀라운 경력

먼저 코무라 주타로의 발자취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 1855년: 오비 번(飫肥藩)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남
  • 11세: 번교인 신토쿠도(振徳堂)에 입학
  • 1870년: 나가사키의 치엔칸(致遠館)에서 영어를 공부한 뒤, 번의 추천을 받아 도쿄대학의 전신인 대학 남교(大学南校)에 입학
  • 1875년: 하버드대학교로 유학, 법학을 전공

기념관에 전시된 연보를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대에 하버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니 말입니다.

요즘은 도쿄대학에 입학해도 가지 않는 학생들이 수험 업계에서 화제가 됩니다. 개성고나 나다고 같은 최상위 명문고 출신들이 하버드나 스탠퍼드로 진학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하죠. 스포츠 선수든 연구자든 음악가든, 이제는 일본을 떠나는 인재가 많아졌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계속 유출되면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잠깐 이야기를 접어두고, 본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버드에 진학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드문 수준이 아니라 희귀한 수준이죠. 어린 시절부터 해외에서 자란 특별한 환경도 아닌데, 코무라 주타로는 사전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던 시절에 하버드 문을 두드렸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은 시간적으로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심코 만화 속 캐릭터처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존했던, 피부에 땀이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20대의 대법원 판사, 30대의 외무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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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무라 주타로의 행보는 여기서부터가 진짜입니다.

하버드에서 돌아온 그는 법무성에 들어가 오늘날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법원의 판사가 되었고, 1884년에는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감이 잘 안 오시겠지만, 20대에 최고법원 판사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빠른 승진입니다. 제가 학생이던 시절에도 사법시험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29~30세 정도였는데, 그 나이에 코무라는 이미 최고 법원의 판사였습니다.

외무성에서 그는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외무대신의 신임을 얻어 1893년에는 청나라 주재 공사관에 발령받았습니다. 이듬해인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외교 최전선의 핵심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고, 이후 외무성 차관(次官)에 올랐습니다.

당시 차관은 오늘날의 사무차관에 해당하는, 실질적으로 성(省)의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였습니다. 현대 일본에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목표로 하는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조차 도쿄대 출신들에게 어려운 관문인데, 그 관문을 통과한 최상위 인재들에게조차 사무차관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불리는 자리입니다. 코무라 주타로는 그 자리에 30대에 도달한 것입니다.

영일동맹 체결과 포츠머스 조약

1901년, 코무라는 가쓰라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902년, 그는 영일동맹을 체결합니다.

이는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열강이 아시아 국가와 대등한 조약을 맺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유럽인들의 눈에 아시아는 식민지로 삼을 대상일 뿐이었고, 실제로 동등한 '민족'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의 대영제국은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초강대국이었고, 원래 일본과 대등한 동맹을 맺을 이유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배경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남진 정책을 막고 싶다는 영국의 계산이 있었지만, 일본 내에서 영일동맹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코무라 주타로 자신이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좋든 싫든 일본은 이 영일동맹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코무라 주타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의 강화 회담에서 코무라는 일본 측 전권대사로서 포츠머스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오비라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인물이 나라의 운명을 건 협상에 일본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것 말입니다.

시골에서 세계로, 어떻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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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얼마 전 오비에 가봤는데, 솔직히 말해 정말 깊은 시골이었습니다. 기차가 한 시간에 한 대 오거나, 아예 오지 않기도 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도쿄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철도도 제대로 없었는데, 걸어서 갔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나아간 끝에 세계 무대로 비약한 걸까요? 바로 이 땅에서요?

저는 예전에 도쿄의 학원에서 오랫동안 강사로 일했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몇 시간씩 학원에서 공부하고, 수업이 끝나면 자습실에서 또 공부한 뒤에야 집에 돌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며 늘 생각했습니다. 도쿄의 교육 환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구나.

코무라 주타로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운과 시기의 도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연히 공신생(貢進生)이라는 번 추천 제도가 있어 번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참고로 공신생이라고 해서 모두 성적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는데, 주타로와 같은 시기에 공신생이 된 인물 중에는 하토야마 가문의 선조인 하토야마 카즈오(鳩山和夫)도 있었지만, 하버드까지 유학을 간 것은 코무라 주타로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두각이 얼마나 남달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시대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노력하는 자에게는 기회의 문이 더 넓게 열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관세 자주권 회복, 일본이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순간

1908년,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된 코무라 주타로는 생애 최대의 역사적 업적을 이룹니다. 바로 불평등조약의 개정, 그중에서도 "관세 자주권 회복"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비로소 세계로부터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막막한 시절 막부가 맺었던 불평등한 조약의 굴레를 벗고, 나라의 관문을 스스로 지킬 권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오비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하버드로, 대법원으로, 세계 외교 무대로 나아간 코무라 주타로. 그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일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