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아스카 시대 일본의 토지 제도와 장원의 탄생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항상 장원(莊園)이라는 용어를 마주하게 됩니다. 장원이라 하면 귀족이나 사찰이 소유한 사유지에서 농민들이 벼농사를 강제로 지어야 했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지배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마쿠라 시대의 지두(地頭)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토지 상황부터 순서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스카 시대의 토지 상황

장원이 성립하기 전 토지의 소유자 ⇒ 조정(국가·천황)

이것이 가장 큰 전제입니다.

(그 이전 야마토 정권 시기에는 유력 호족들이 각각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아스카 시대에는 행정의 중앙집권화와 안정화를 위해 지배 주체가 조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농민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토지의 소유주인 조정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형태였습니다. 이렇게 빌린 땅을 구분전(口分田)이라고 부릅니다. 구분전은 6세 이상의 개인에게 6년마다 한 번씩 지급되었으며, 일반 남성에게는 2단(段), 여성에게는 그 2/3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땅을 개인에게 빌려주면 본인이 사망할 때 반환해야 했고, 조(租)라는 세금(벼)을 내야 했습니다. 세율은 생산된 벼의 약 3%였으며, 여기에 조용조(租庸調)의 일부(포 등 특산물)와 잡요(雜徭)(토목공사 등의 부역) 납부 의무가 더해졌고, 군역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토지(논)의 처리 방식은 반수법(班田收授法)이라는 법률로 규정되었으며,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의 기초를 형성하는 제도였습니다.

동아시아의 상황

이제 같은 시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수(隋)와 당(唐)이라는 중앙집권적 권력을 지닌 국가가 등장했습니다.

그 전까지 약 300년간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한반도 역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대한 권력을 지닌 국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에 일본의 외교는 '수·당으로부터 선진 기술을 배운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 기억해 둘 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쇼토쿠 태자 시절의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찰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는 '기술과 지식은 배우되, 대등한 입장에서 맞서겠다'는 태도를 명확히 보여준 사례입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수나라는 '일본이 고구려와 연합하지 않을까' 경계하여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수의 군사력을 경계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만큼 거대한 나라였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기술과 제도를 배우는 동시에 군사적 대비도 필요했습니다. 물론 규슈나 도호쿠 등 아직 지배가 미치지 않은 지역에 대한 대비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반수법(班田收授法)의 구조와 목적

일본에서 이루어진 논을 이용한 농업은 높은 수확량만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게으름을 피워서는 수확을 거둘 수 없습니다. 즉, 사람들을 땅에 묶어 농사를 짓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땅에 묶을 수 있다 = 농업 외 노동력 확보 가능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미 323년(고분 시대)에 수리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당시에는 습지가 지금보다 많고 홍수도 잦았기 때문에 토목공사는 아스카 시대에도 통치에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구분전을 통해 노동력을 땅에 묶어두면, 토목공사에 인력이 필요하거나 갑자기 병사를 동원해야 할 때 즉시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의 제도였던 셈입니다.

납세자에게는 가혹한 제도

그러나 납세자 입장에서는 결코 편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물품 납부뿐 아니라 노동력 제공까지 해야 한다는 점이 컸습니다. 잡요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조(租)는 면제되지 않았고, 군역 시에는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 가야 하는 등 매우 가혹한 제도였습니다.

특히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이 있어 당시 호적상 남녀 비율이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잡요는 지방 행정관인 국사(國司)의 권한이었지만, 국사가 사적으로 잡요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전반까지 오랫동안 지속된 반수법이었지만, 이 제도만으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됩니다.

반수법 이후의 토지 제도

아스카 시대에 율령제가 도입된 이후 헤이안 시대 전반까지 반수법이 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도망자가 늘어나면서 점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농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반수법이 점차 무력화된 과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구분전 외에도 남는 논(野田)을 경작하거나, 사찰·신사·귀족의 땅을 빌려 그 대가로 벼를 지불하는(소작) 형태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조·용·조, 군역, 잡요, 출거(出擧) 등 각종 세금 부담 속에서 매우 고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구분전 외의 땅을 경작해야 했을까?

애초에 고대의 논 개발 대상지는 샘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예컨대 계곡 부근이 비교적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이후의 추세처럼 다이호 율령 제정 이후에도 인구는 계속 증가했습니다(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기술 발전도 인구 증가의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논에 적합한 좋은 땅을 배정받는 것은 아니며, 집에서 먼 곳의 논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귀족의 영지가 근처에 있다면 오히려 땅을 빌려 경작하는 쪽이 부담이 덜했을 수 있습니다.

세율이 '생산된 벼의 약 3%'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분전에서 생산되는 벼가 적더라도 다른 밭에서 식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담이 너무 무겁다고 느끼면 마지막 수단인 '도망'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도망의 이유가 세금 회피만은 아니었습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후지와라쿄(藤原京), 헤이조쿄(平城京), 나니와쿄(難波京)(오사카시), 쿠니쿄(恭仁京)(교토부 가모정) 등의 도읍 건설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면서 백성들의 도피가 더욱 부채질되었습니다. 붙잡히면 원래 거주지로 강제 송환되거나 처벌받았기 때문에, 도망자 대부분은 유랑민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세일신법과 간전영년사재법

결국 수도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방의 세수를 늘리는 일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라 시대인 723년,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미개간지를 새로 개간하면 3대에 걸쳐 소유를 인정하고, 기존의 관개 시설을 활용해 개간한 경우에는 1대에 한해 소유를 인정한다는 새로운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743년, 새로운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이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개간한 땅을 영구히 소유할 수 있도록 한 법으로, 일시적으로 큰 효과를 냈습니다.

동시에 사찰, 귀족, 지방 호족의 사유지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법에는 신분에 따른 면적 제한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찰과 귀족에게 유리하게 작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구분전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사유지 확대에 기여했습니다. 이들을 통해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지고 사유지가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초기 장원(初期荘園)입니다.

초기 장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단계의 장원은 아직 율령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조(租)(세금)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이후 장원은 더욱 발전하며 변화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