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 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 시대(奈良時代)라고 하면 "710년(와도 3년), 평성경(헤이조쿄)"이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를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헤이조쿄로 천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후지와라쿄에서의 천도 이유

약 1300년 전, 헤이조쿄로 천도하기 전 수도였던 곳은 후지와라쿄(藤原京)였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무 천황 시대인 676년에 후지와라쿄 축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덴무 천황의 붕어로 한때 중단되었지만, 지토 천황이 계획을 이어받아 690년에 공사를 재개했고, 694년에 천도를 실현했습니다.

후지와라쿄는 이전처럼 궁과 몇 개의 관청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본격적인 도성제를 갖춘 도시였습니다. 동서 5.3km, 남북 4.8km로 헤이조쿄나 헤이안쿄보다 넓은 당시 최대급 고대 도시였으며, 초기 인구는 약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와를 얹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분을 파내고 평지를 만드는 작업부터 도로 정비, 하수도 정비, 토지 준비, 자재 조달까지 이어진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공을 들여 만든 후지와라쿄에서 왜 천도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1. 도시 규모가 너무 작았다는 설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 천도한 이유로 예전에는 이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후지와라쿄의 실제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이 설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 당나라 장안과 모습이 달랐다는 설

이 설 역시 상당히 유력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일본은 653년, 654년, 659년, 665년, 667년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지만, 669년부터 702년까지 약 32년간 견당사 파견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중 665년과 667년의 견당사는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되며, 엄밀히 말하면 견당사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 667년에는 아예 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견당사 자체도 시대에 따라 성격이 달랐습니다. 신라·당 연합군과 싸운 백강 전투(663년) 이후 665년~669년에 파견된 견당사는 "일본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사신을 돌려보낸다"는 명목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665년과 667년의 견당사가 백제 부흥군 방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견당사 파견은 32년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702년에 견당사를 파견해 704년에 귀국했는데, 그때 목격한 장안의 실제 모습이 기존 정보와 달랐기 때문에 천도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천도 논의는 문무 천황 대인 707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지와라쿄와 장안의 차이점 직접 비교하기

후지와라쿄의 그림을 보면 궁이 도시 중앙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지와라궁 내부에는 북쪽에 천황이 거주하는 내리(內裏), 정치와 의식을 치르는 대극전, 귀족과 관리들이 모이는 조당원이 남북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반면 모델이 된 당나라의 장안을 살펴보겠습니다.

후지와라궁 대극전의 모델이 된 장안의 대극전 주변을 자세히 보면, 그 북쪽에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宮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위치 관계는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도시 전체로 보면 궁성의 위치가 상당히 다릅니다. 솔직히 "이것이 정말 모델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여기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원래 수나라 때 쓰던 도성을 그대로 이어 사용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702년 마지막 견당사 파견 이전에 장안의 확장 공사가 진행되어, 확장된 도시를 예상하고 만든 것일까요? 실제로 공사는 진행되긴 했습니다. 영안궁(훗날의 대명궁) 건설은 634년, 당나라 초대 황제 고조(이연)의 거처를 더 적합한 장소로 옮기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고조가 붕어하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후 662년에 재개되었습니다. 견당사 파견 시기를 고려하면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결국 너무 무리한 상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면 "장안과 모델이 달랐다"는 설은 의심스럽습니다. 견당사가 귀국하면서 완전한 당식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하더라도, 겨우 도시로서 기능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춘 도시를 짧은 기간에 '버린다'는 발상은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 실제로 모델로 삼은 도시는 장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낙양을 참고했다", "유교 경전 『주례』에 나오는 왕성(王城)의 축조법을 참고했다" 등의 설이 존재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설을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3. 배수 시설이 부족했다는 설

후지와라쿄의 그림을 보면 남쪽에 작은 점(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곳은 구릉지대나 산으로 이루어진 고지대라고 합니다. 게다가 북쪽에는 미미나시산이,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가구산과 우네비산이 있어, 모든 배수가 후지와라궁 주변으로 흘러들 것으로 예측됩니다.

실제로 『속일본기』에는 "경내외에 악취가 많다"는 기록이 있어, 예상대로 위생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생 상태가 나쁘면 역병도 번질 수 있습니다.

4.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의도라는 설

후지와라쿄가 나라로 천도한 것은 아스카 땅과 가까웠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구세력과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설입니다.

실제로 사찰과 신사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을 분리하기 위해 수도를 옮겼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 본인은 황실과의 외척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 인물입니다. 좌대신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우대신에 머물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후히토가 좌대신이 되면 다른 사람이 우대신이 되어 권력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척 관계 구축에 능한 정치가라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뿐만 아니라 문무 천황이나 겐메이 여제의 의도도 숨겨져 있거나 얽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리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 천도한 이유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두 가지인 "배수 시설 부족"과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의도"가 가장 타당한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안과 달랐다"는 설에 대해서는 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후대의 합리화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