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조쿄(平城京)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보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땅속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천 년 전 수도의 풍경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헤이조쿄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
헤이조쿄는 나라의 정치 중심지였던 만큼, 관리들이 실무에 사용하던 도구들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목간(木簡)을 작성할 때 쓰던 벼루·먹·붓 같은 필기구입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수도가 행정의 중심으로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농촌까지 퍼진 문자 문화, 먹글씨 토기
그렇다면 지방의 농촌 지역은 어땠을까요? 흥미롭게도 문자가 농촌까지 깊숙이 침투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토기에 소유자의 이름이나 지명, 길운을 비는 문구인 길상구(吉祥句)를 적어 넣은 먹글씨 토기(墨書土器)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토기가 지방 곳곳에서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미 꽤 넓은 지역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 시기에는 이미 글을 쓰는 문화가 일반 백성들에게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 문화의 확산은 율령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세 징수나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목간에 기록된 세금과 물품 유통
출토된 목간에는 국명(國名),세금의 종류, 물품명, 보낸 사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금이나 옻칠 같은 물품이 각지에서 수도로 운반되었고, 당시의 화폐인 화동개진(和同開珎)도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당시 세금인 조(調)와 용(庸)을 납부할 때, 자기 고장에서 요구되는 물품을 직접 만들 수 없다면 특산품을 팔아 돈을 번 다음, 굳이 중앙 정부가 요구하는 물품을 사서 바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자와 사람이 모여들면서 도시와 숙박 시설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 속에서 당시 수도의 활기찬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저주와 정화의 도구들
반면, 평온하지만은 않은 유물들도 있습니다. 가슴에 못이 박힌 이름표 달린 인형, 남자와의 인연을 끊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접시 등이 그 예입니다. 저주 인형은 당시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고, 실제로 저주를 행했다면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중죄였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재앙과 질병의 원인을 사람의 죄(罪)와 더러움(穢)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액운과 질병을 제사 도구에 옮긴 뒤 물에 흘려보내는 정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실제로 헤이조쿄의 배수로에서는 이러한 저주 도구와 정화 도구 여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헤이조쿄에 살았던 사람들
헤이조쿄에 살았던 사람들은 중앙 관리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섬기는 하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태정대신(太政大臣)에게는 하인 300명, 1위(一位) 관리에게는 100명이 딸렸다고 하니, 권력자들의 저택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러 사람이 한 저택에 함께 살다 보니 일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질투와 갈등, 은근한 신경전 같은 사람 마음의 미묘함은 지금이나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토된 유물들은 화려한 역사의 이면에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오늘날까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