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노부나가는 어떻게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2만 5천 대군을 물리쳤을까?

1560년, 스루가국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락(上洛)을 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국으로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의 수호 다이묘(守護大名)로서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닌 가문이었습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겨우 오와리 일국을 통일한 상황이었고, 상대는 스루가·도토미·미카와 세 나라를 다스리는 이마가와 가문이었습니다. 병력 차이도 극심했습니다. 오다 군은 5천 명에 불과한 반면 이마가와 군은 2만 5천 명에 달해, 오다 가문은 멸망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오케하자마 전투의 전초전

당시 이마가와 군의 선봉장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였습니다.

17세의 젊은 무장이었던 모토야스는 적진을 돌파해 병력이 부족했던 오다카 성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후 이마가와 군은 오다 군의 최전선 요새를 함락하는 등 전초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어 갔습니다.

한편 오다 가문은 거성 기요스 성에서 이마가와 군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보다 다섯 배가 넘는 병력과 마주한 상황에서 농성할 것인지, 아니면 출정할 것인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모토야스가 최전선의 요새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접한 노부나가는 2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과감하게 성 밖으로 나섭니다.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 농성이든 출정이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직접 나서서 승기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을 이끌고 타국을 침공하는 동안 본거지가 공격받을 염려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노부나가에게 남은 선택지는 성을 등지고 야전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침착한 판단이 노부나가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오케하자마 전투의 승부

당시 악천후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대는 오와리의 오케하자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야를 가로막는 폭우 때문에 무리한 행군을 피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다 군은 이 폭우를 역이용해 이마가와 군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그들의 본영을 기습합니다. 숫자상으로는 이마가와 군이 두 배 이상 많았지만, 갑작스러운 기습 앞에 이마가와 군 본영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다 군은 대군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폭우 속에서 노부나가와 요시모토는 직접 창을 들고 격렬하게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이마가와 군의 하타모토(旗本) 부대는 궤멸했고, 마침내 요시모토가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대군이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도 패배했습니다.

아무리 대군을 보유하고 있어도 그 대군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케다 신겐도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2만의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가 우에스기 겐신의 1만 3천 병력에게 몰리는 실수를 저지른 바 있습니다.

만약 요시모토가 항상 1만의 병력을 하나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노부나가는 패배했을 것이고,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정보 수집 능력이 만든 승리

오다 노부나가는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영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그는 요시모토를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이 일본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