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4년 영국 의회는 보스턴 차 사건에 대응하여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처벌하기 위한 일련의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법은 용납할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강압적 조치에는 파괴된 차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보스턴항법(Boston Port Act)이 포함되었습니다.
미국의 반응:
- 참을 수 없는 행위(Intolerable Acts)는 미국 식민지들 사이에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몇몇 식민지는 위원회를 소집하고 잠재적인 군사 충돌에 대비함으로써 매사추세츠를 지지했습니다.
군사적 행동 촉구:
-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의 영국군이 식민지 총기를 압수하고 패트리어트 지도자들을 체포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보스턴에 전해졌습니다.
- 매사추세츠 안전위원회는 대결에 대비해 민병대를 소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영국 배포:
- 이에 대응하여 영국군 총사령관 토마스 게이지 장군은 콩코드에 있는 무기 보관함을 탈취하고 파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 1775년 4월 19일, 영국군이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충돌하여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이 교전은 영국의 승리로 이어졌지만 보스턴을 요새화하고 잠재적인 영국의 움직임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식민지 요새:
- 전투 후 패트리어트 지도자들은 보스턴 주변 언덕, 특히 브리즈 힐(Breed's Hill)과 벙커 힐(Bunker Hill)을 요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 1775년 6월 16일, 윌리엄 프레스콧 대령은 한 무리의 군인들을 이끌고 브리즈 힐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소규모 부대를 인근 벙커 힐로 보냈습니다.
영국의 반응:
- Breed's Hill과 Bunker Hill의 활동에 놀란 영국군은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했습니다.
- 이는 결국 1775년 6월 17일 벙커힐 전투로 이어졌고, 이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영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