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샤를 7세: 백년전쟁을 끝낸 '승리자' 프랑스 왕 (1422~1461)

샤를 7세: 백년전쟁을 끝낸  승리자  프랑스 왕 (1422~1461)샤를 7세(Charles VII, 1403~1461)는 '승리자'(le Victorieux)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 국왕이다. 1422년부터 1461년까지 거의 40년에 걸친 그의 치세는 백년전쟁의 종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를 아우르는 그의 통치기는 한때 카페 왕조의 멸망이 현실로 다가올 만큼 위태로웠다.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부르주 왕'이라는 조롱 섞인 별칭에서 벗어나 왕위와 정통성을 되찾았고, 영국으로부터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승리자 샤를 7세'가 되었음에도 그는 오랫동안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의 영광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재평가받는 군주로 프랑스 왕정의 권위를 회복하고 재정과 군제를 개혁·근대화한 인물로 기록된다.

미약한 '부르주 왕' 샤를 7세

'광인왕' 샤를 6세와 바이에른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샤를은 1417년 두 형이 의문사하자 도팽(황태자)이 되었다. 그는 병약해 보였고, 쇠약해진 왕가의 명예와 위상을 떠맡기엔 너무나 왜소한 존재였다.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 와중에 파리에서 쫓겨난 그는 부르주에 피신해 소수의 추종자들과 소규모 궁정을 꾸렸다. 한편 영국 왕은 노르망디를 점령했고, 부르고뉴 공작 장상공(Jean sans Peur)은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와 결탁해 정권을 장악한 뒤 샤를을 '사생아'로 선언했다.

장상공은 도팽을 회유해 자신의 수하에 두려 했지만, 1419년 몽트뢰 회의에서 언쟁 끝에 장상공이 암살당했다. 새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Philippe le Bon)과 이사벨라의 복수는 샤를에게 향했다. 1420년 트루아 조약에서 이미 심신이 온전치 못한 샤를 6세와 이사벨라는 샤를을 폐위·상속배제하고 영국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제도를 유지하며 프랑스 왕관을 주장했다. 이사벨라의 저항은 허사로 끝났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돌연사한 데 이어 10월 21일 샤를 6세마저 서거했지만, 랭카스터 복합군주제는 헨리 6세에게 넘어갔고 베드퍼드 공작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도팽은 샤를 7세로서 왕위를 주장했고, 왕관을 둘러싼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욜랑드 다라곤과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의 승리

샤를 7세: 백년전쟁을 끝낸  승리자  프랑스 왕 (1422~1461)다소 평범한 인물이었던 샤를은 곁에 믿을 만한 인재가 부족했고, 당대의 화려한 제후들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런 그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가 안주 공작의 아내이자 자신의 장모인 욜랑드 다라곤(Yolande d'Aragon)이었다. 그녀는 인내심 강한 외교력으로 분열된 세력을 화해시키고 규합해 침략자 앞에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423년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Bataille de La Brossinière)는 프랑스군이 거둔 첫 의미 있는 승리였다.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메인과 앙주를 휩쓸고 약탈하자, 욜랑드는 사위인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제후들을 설득해 군사적 대응에 나섰다. 앙브루아즈 드 로레, 오말 백작, 모르테르 백작 장 8세 다르쿠르 등은 병력을 모아 영국군의 귀로에 매복했다. 정찰병 간 짧은 접전 후 프랑스 기사단이 정연하게 돌격해 영국군을 말에서 끌어내렸고, 치열한 저항에도 영국군은 궤멸되었으며 소수만 도망쳤다. 이 승리는 프랑스 땅을 점진적으로 수복하는 기점이 되었다.

잔 다르크와 '승리자' 샤를

라 브로시니에르의 전과에도 전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영국군은 크레방(1423)과 베르뇌유(1424)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급기야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오를레앙이 함락되면 루아르 강 이남으로 진격해 샤를의 마지막 피신처까지 위협할 상황이었다. 그때 로렌의 돔레미 출신 어린 목동 소녀가 구원처럼 나타났다.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도움으로 샤를은 1429년 오를레앙을 해방시키고,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정통성을 공인받았다. 잔과 함께 루아르 강 이북의 영국·부르고뉴 연합 점령지를 수복했으나, 1431년 5월 30일 잔이 루앙에서 화형당할 때 샤를은 그녀를 구하려 적극 나서지 않았다. 이는 '비겁한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샤를 7세: 백년전쟁을 끝낸  승리자  프랑스 왕 (1422~1461)부르고뉴를 영국 진영에서 떼어내기 위해 샤를 7세는 1435년 아라스 조약(Traité d'Arras)에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 선량공에게 큰 양보를 했다. 영·부르고뉴 동맹이 깨지자 파리를 수복했고, 1437년 개선 입성했으나 파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베리와 투렌의 성을 오가며 지냈다. 노르망디와 기엔(1450~1453)은 뛰어난 장수들의 활약으로 되찾았다. 1449년 루앙이 봉기해 샤를 7세에게 문을 열었고, 자크 쾨르(Jacques Cœur)와 함께 개선했다. 영국이 셰르부르에 상륙해 캉으로 진격했으나 포르미니 전투(1450)에서 프랑스군에 격파당했고, 기엔에서는 카스티용 전투(1453) 승리로 영국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국 칼레만 영국 손에 남았다. 백년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음(정식 조약은 없었음)에도 샤를은 왕국 재건에 몰두했다.

샤를 7세의 개혁

그는 지방을 좀먹던 약탈단(에코르슈뢰르, Écorcheurs)을 소탕하고자 상비군을 두어 치안을 회복시켰으며, 오를레앙에서 삼부회(États généraux)를 소집했다.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도팽 루이(훗날 루이 11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으나(보헤미아 소요에 빗대 '프라게리'라 불림), 샤를은 이를 진압했다. 1445~1448년 상비군을 창설했는데, 귀족 출신으로 편성된 기병 '오르도넹스 중대'(compagnies d'ordonnance)와 평민 출신으로 면세 특권을 준 보병 '프랑 아르셰'(francs-archers)로 구성했다.

화폐가 안정되고 정기적 세수입으로 삼부회 소집이 불필요해졌으며, 국왕 재상 자크 쾨르의 활약으로 상업이 부흥했다. 1443년 가을 소뮈르 대칙령(Grande Ordonnance de Saumur)을 반포하고, 리옹과 샹파뉴의 대시장에 특권을 부여하며 견직물 공방을 설치하는 등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특유의 배은망덕함으로 자크 쾨르를 신하들의 질투에 희생양으로 삼아(1453) 그를 파산시키고 추방했다.

1438년 부르주에서 열린 전국교회회의(Concile national)를 통해 교회 문제도 정비했다. '실용적 제재'(Pragmatique Sanction)로 프랑스 교회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교황이 교회 혜택금(연금, 예약권, 기대권 등) 명목으로 걷어가던 공납을 축소했다. 각 지방의 관습법을 성문화해 법전 통일의 기초를 닦았고, 툴루즈(1447)와 그르노블(1453)에 새 고등법원(Parlement)을 설치했다. 말년엔 상업 부흥과 왕권 강화를 이뤘으나, 부르고뉴 공국의 세력만은 여전히 위협으로 남았다.

총애받는 정부와 반항하는 아들

샤를 7세: 백년전쟁을 끝낸  승리자  프랑스 왕 (1422~1461)샤를 7세 치세에 왕실 정부(maîtresse en titre) 제도가 본격 등장했다. 1443년경 피에르 드 브레제의 공작으로 아녜스 소렐(Agnès Sorel)이 정부의 자리에 올랐고, 그녀의 영향력은 왕정 운영에까지 미쳤다. 샤를은 그녀에게 로슈 성(Château de Loches), 보테쉬르마른(Beauté-sur-Marne, '미녀 부인' 칭호의 유래), 펜티에브르 백작령을 하사하고, 사이에서 낳은 세 딸을 적출로 인정했다.

아녜스는 파격적인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왕비 마리 다주(Marie d'Anjou)를 압도했다. 그녀는 자크 쾨르에게 물품을 조달받으며 그와 염문이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아녜스는 브레세와 연계해 왕정 운영에 실질적(다소 과장되었지만) 영향을 행사했다.

샤를 7세는 마리 다주와 혼인했으며, 안주 궁정에서 자라 장모 욜랑드 다라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슬하에 12자녀를 두었으나 5명만 생존했다. 그중 도팽 루이는 훗날 루이 11세가 된다. 부자 관계는 최악이어서 루이는 음모로 궁정을 어지럽혔고, 1447년 샤를은 아들을 추방했다. 1461년 7월 22일 뫼생쉬에브르에서 샤를 7세가 숨을 거둘 때까지 부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참고문헌

  • 샤를 7세: 생애와 정책(Charles VII : une vie, une politique), 필리프 콩타민(Philippe Contamine), 페랭(Perrin), 2017년 4월.
  • 샤를 7세: 승리자(Charles VII : Le Victorieux), 조르주 보르도노브(Georges Bordonove), 피그말리옹(Pygmalion), 2006년.
  • 샤를 7세와 그의 미스터리(Charles VII et son mystère), 필리프 에를랑제(Philippe Erlanger), 갈리마르(Gallimard),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