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이전 이베리아인의 헌신과 충성: '데보티오' 관습과 인디빌 왕의 흥망

전사의 맹세, '데보티오'란 무엇인가

데보티오(devotio)는 이베리아인, 켈트인, 칸타브리아인, 켈트이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등 로마 이전 히스파니아의 여러 민족들이 지키던 고유한 관습이었다. 이 제도 아래 한 명의 전사(devotus)는 유력한 인물(patronus)의 문하에 들어가 그를 목숨 걸고 보호할 것을 서약했다. 핵심은 단순했다. 주군이 전사하는 순간 자신도 살아남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데보티오를 성립시키기 위한 어떤 의식이나 의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데보티(devoti)라 불린 이들은 자신의 파트로누스를 끝까지 방어해야 했으며, 실패했을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엄중한 규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관습이 실제로 작동한 대표적 사례로는 사군토(Sagunto), 누만시아(Numancia), 그리고 칸타브리아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은 이 강렬한 충성심의 결과를 뼈저리게 겪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역이용하는 법도 배웠다. 부족의 수령을 죽이면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수령을 인질로 잡으면 그 백성들의 충성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 이전의 부족들은 판세에 따라 카르타고 혹은 로마 어느 한쪽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인디빌(Indíbil), 일레르게테스(Ilergetes)족의 왕이었다. 일레르게테스는 오늘날 스페인의 리에이다(Lleida)와 우에스카(Huesca) 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이베리아 부족이었다.

로마 이전 이베리아인의 헌신과 충성:  데보티오  관습과 인디빌 왕의 흥망

카르타고 편에서 시작된 인디빌의 선택

처음에 인디빌은 카르타고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그를 한노(Hanno) 휘하에 두었다. 한노는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전설적인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는 동안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도록 남겨진 포에니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인디빌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전쟁이 그토록 빠르게 히스파니아로 번질 것이라고 계산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군사 전문가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암푸리아스(Ampurias)에 상륙하여 두 개의 군단을 이끌고 한노와 교전, 오늘날 타라고나(Tarragona) 인근의 키사(Cissa)에서 그를 격파했다. 포에니 측의 패배는 심각했다. 6천 명이 전사하고 2천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그중에는 한노 본인과 인디빌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원군과 함께 늦게 도착한 아스드루발 바르카는 로마 함대를 괴롭히고 에브로(Ebro) 강을 양 세력 간의 자연 국경으로 유지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포로에서 해방까지: 조공과 인질의 대가

인디빌의 석방은 공납과 일레르게테스 인질들을 로마에 넘기는 조건으로 이루어졌고, 그는 그때까지 통치하던 영토의 상당 부분에서도 쫓겨났다. 이듬해 그는 친카르타고 활동을 재개하여 로마의 이해관계와 연결된 여러 켈트이베리아 부족들을 공격했다. 아스드루발과의 새로운 동맹은 그에게 덜 호전적인 이웃 소왕들 사이에서 권력을 확장할 재량을 주었고, 특히 두 스키피오 형제가 카스툴로(Cástulo)와 일로르키(Ilorci)(오늘날의 하엔)에서 패배하고 전사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와의 우정은 일레르게테스 과두 지배자에게 공짜가 아니었다. 그는 상당량의 은과 자신의 아내를 인질로 바쳐야 했다.

로마로의 배신, 그리고 다시 카르타고로

바르카 가문의 무한한 탐욕에 질렸거나, 아니면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나는 정세의 변화에 주목했든, 기원전 209년 인디빌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두 스키피오 중 한 사람의 아들이자 원로원이 포에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한 새로운 장군 — 와 밀약을 맺었다. 로마인은 그의 행운에 매료된 많은 이베리아인들을 자신의 지휘 아래 모았는데, 이것이 인디빌이 충성 대상을 바꾸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일레르게테스의 지원은 아직 아스드루발의 손에 남아 있던 인질들의 반환과, 카르타고가 이베리아에서 축출된 후 자신의 공화국 속국 왕 지위의 확인을 조건으로 제공될 예정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베리아인들이 로마를 '양의 탈을 쓴 사자'로 보았을 수도 있고, 바르카의 첩자들이 원주민 소왕들을 매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인디빌이 로마에 대한 새로운 충성 서약을 단 1년밖에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208년, 인디빌은 다시 이베리아 동맹군과 함께 아스드루발의 진영에 섰다. 바이쿨라(Baécula) 전투는 키사 전투처럼 카르타고에 불리하게 결론 났다. 아스드루발은 도주하는 데 성공했고, 포에니 군대는 패배했으며, 인디빌은 또다시 포로로 잡혀 거액의 공납과 맞교환으로 석방되었다.

로마 이전 이베리아인의 헌신과 충성:  데보티오  관습과 인디빌 왕의 흥망

인디빌과 만도니오

최후의 반란: 인디빌과 만도니오의 최후

그러나 세 번째 시도는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해, 인디빌은 카르타고의 마곤(Mago)이 추진한 새로운 히스파니아 반로마 봉기를 지원했다. 아우세타니(Ausetani)족의 또 다른 이베리아 소왕 만도니오(Mandonio) — 아마도 그의 처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 도 기원전 206년에 벌어진 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는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입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키피오와 그의 충실한 동료 가이우스 라일리우스(Gaius Laelius)는 세데타니아(Sedetania)의 좁은 계곡에서 2만 명의 반군을 몰살시켰다. 이번에는 인디빌과 만도니오가 간신히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스키피오의 아프리카행은 완강한 일레르게테스 소왕의 고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불만 세력은 다시 한번 로마에 맞서 봉기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인디빌은 전투 중 전사했고, 만도니오는 무조건 항복의 일환으로 로마인들에게 넘겨져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