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31년 9월, 그리스 서해안 악티움 곶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은 고대 세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마 공화정 최대 규모의 내전이자 기원전에 치러진 해전 중 가장 큰 전투였던 악티움 해전은 지중해의 패권을 걸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격돌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공화정 로마는 소멸했고, 이후 500년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로마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겉으로는 로마 대 이집트, 실상은 카이사르의 후계자 싸움

악티움은 그리스 서부 프레베자 인근에 위치한 곶으로, 약 1,500년 뒤 지중해 최대의 해전이 다시 한번 이곳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로마인들의 패권 다툼이 그리스 땅에서 치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격돌한 파르살루스 전투 역시 그리스에서 열렸습니다.
세계사 교과서에는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파르살루스 전투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 보이는 악티움 해전은 어느 교과서에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카이사르가 남긴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법'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악티움 해전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누가 싸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순수한 로마의 내전이었다면, 악티움 해전은 표면적으로 로마 공화국 대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전쟁, 즉 지중해 패권을 건 국가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천재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이 옥타비아누스를 '초대 황제'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스스로를 황제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시진황의 '황제'라는 칭호를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오역에 가깝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다만 카이사르에게 물려받은 이름을 계승했을 뿐이며, 그 이름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으로 이어졌고, 훗날 사람들이 이 이름을 '황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종신 독재관을 자칭하다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최후를 교훈 삼은 옥타비아누스는 단지 '프린켑스(princeps)', 즉 '로마의 제1시민'이라는 이름만을 사용했습니다. 같은 시대의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마저 속일 정도였으니, 훗날 우리가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티움 해전에서도 이런 수완이 빛을 발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 대 안토니우스의 구도만 놓고 보면 이것은 명백한 로마의 내전입니다. 그런데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최후는 어떠했습니까? 암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구도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이라면 더 이상 내전이 아니라, 폭정하는 이방의 여왕으로부터 로마 공화국을 지키는 정당한 전쟁이 됩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습니다.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던 클레오파트라조차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입니다.
로마 병사들의 대량 이탈
이 구도는 극적인 효과를 냈습니다. 일본의 보신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색의 어기를 들고 도쿠가와 군을 '조적(朝敵)'으로 몰아넣은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병사들은 자신이 로마의 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설령 안토니우스가 술라 같은 카리스마를 지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홀려 있었습니다. 로마 영토인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클레오파트라에게 통째로 넘겼고, 개선식마저 로마가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녹색으로 표시된 영토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한 땅입니다. 상식을 벗어난 처사였습니다.
병사들은 하나둘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이집트에는 오직 부만 있었습니다. 3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이집트는 막대한 자금으로 용병을 대거 고용하고 거대한 전함을 잔뜩 건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조국을 지키며 싸우는 병사와, 돈 때문에만 싸우는 병사—어느 쪽이 더 강할까요?
악티움 해전의 전개
그럼에도 안토니우스 진영에 남은 병사들은 육전을 제안했습니다. 육로를 통해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치력은 세계사 최고 수준이었지만 정작 전투 실력은 미숙했고, 실질적인 군 지휘는 아그리파 장군에게 맡겨졌습니다. 객관적으로 아그리파와 안토니우스의 역량은 비슷했으므로, 육전이었다면 안토니우스가 승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어떻게든 해전을 주장했고, 클레오파트라의 예스맨이 되어버린 안토니우스는 육전 대신 해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방침을 채택했습니다. 이 결정 또한 많은 유능한 병사들을 안토니우스에게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왜 해전을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클레오파트라의 행보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했으니까요.
순수한 전력만 따지면 여전히 클레오파트라 측이 우위였습니다. 로마군 병력은 2만을 넘지 못한 반면 이집트군은 약 2만 3천이었고, 전함 수는 로마가 약 400척, 이집트가 약 230척이었지만 이집트 측에는 거대한 전함이 많았습니다.
이 구도는 1,600년 뒤 세계의 해양 패권을 걸고 벌어진 무적함대(아르마다) 해전에서도 반복됩니다. 작은 배는 회전이 빠릅니다. 소형 선박이 많던 영국이 거함 위주의 스페인을 꺾은 것처럼, 이 요소가 없었다 해도 어차피 로마가 승리했을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집트측의 열세는 명백해졌습니다. 마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를 본 클레오파트라는 전장에서 이탈했고, 안토니우스 역시 그것을 보고 전선을 떠났습니다. 남은 병사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전투였습니다.
전투 결과를 접한 동방의 제후들은 잇달아 로마 편에 섰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모든 것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클레오파트라 없이는 살 수 없었는지, 안토니우스는 즉시 자결했습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팔을 물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중해의 패권은 다시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구한 영웅으로서 개선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집트는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공화정 로마도 곧 소멸합니다.
로마 제국의 탄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