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약 100년간, 로마는 '내전의 세기'라 불리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지중해를 손아귀에 넣은 로마에는 더 이상 맞설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적이 사라지면 스스로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곤 하니까요.
외부에 적을 잃은 로마는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내전의 세기 속에서 갈등이 정점에 달한 시기가 바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립하던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때, 삼두정치 세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우티켄시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대(大) 카토'와 구분하기 위해 역사는 그에게 '소(小) 카토'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던 한 남자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청렴하고 완고했던 보수파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를 탄핵해 사실상 은퇴시켰던 대(大) 카토는 소 카토의 증조부입니다.
역시 피는 거스를 수 없는지, 대소 두 사람 모두 '반영웅'이라 불릴 만한 부분이 닮았습니다. 대 카토가 스키피오를 적대했다면,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미워하며 로마에서 몰아내려 했습니다.
원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던 대 카토는, 자신에게 요직을 내어준 공화정을 사랑하는 보수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급진적으로 변하기 쉬운 법인데, 대 카토는 카르타고의 완전한 파괴를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카르타고를 땅에서 지워버리고 작물조차 자라지 않도록 소금을 뿌렸다고 전해집니다.
무엇이 그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 카토가 카이사르에게 반감을 품게 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공화정의 안녕이었을까요?
'스타 워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루크처럼 은하의 평화와 공화정을 사랑하는 이들이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죠.
스타 워즈에 빗대자면 루크, 레이아, 한 솔로가 카토였고, 제국을 세우려 했던 것이 카이사르였습니다.
카토 가문은 강한 공화정 신봉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검소했으며, 살아생전 동생의 장례식을 치른 것 외에는 큰 지출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젊은 시절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던 것이 그 원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화려하고 유혹 많은 카이사르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으니, 둘이 어울릴 리 없었겠지요.
아버지와 형에게 상속을 물려받은 소 카토는 재무관(쿠아에스토르)으로 선출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부정부패 고발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히 술라와 폼페이우스 파벌의 비리를 추궁하면서 로마 시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소 카토의 청렴함은 적도 만들지만 지지자도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63년 호민관이 되었을 때는 키케로와 함께 카틸리나의 음모를 규탄했는데, 카틸리나를 옹호한 카이사르와는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집요하게 몰아붙였고, 어느 때는 카이사르가 받은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마지못해 편지를 공개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내용이 자신의 연인이자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가 보낸 연애편지였기에 오히려 더 곤란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닐까요?
삼두정치와의 충돌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소 카토의 딸에게 혼담을 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면서 삼두정치가 완성되었습니다.
카토는 삼두정치와 계속 충돌했는데, 특히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려는 '농지법'을 두고 길게 연설을 이어가며 방해했고, 결국 의장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퇴장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카토는 어떤 의미에서 보수파의 일관된 동맹이었습니다. 평민 계급 출신임에도 귀족 쪽에 가까운 정치를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반대로 전통적인 귀족 계급 출신인 카이사르가 개혁파에 속했다는 점도 재미있죠. 현대로 치자면 여당 의원이 세습 정치에 반대하고 1세대 정치인이 세습을 찬양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삼두정치는 카토를 그리스 지방의 키프로스로 좌천시켰고, 카토는 그곳을 유능하게 통치했습니다. 이후 로마로 돌아온 뒤에는, 삼두정치 쪽과 원로원 쪽 어느 쪽이 집정관을 배출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정치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삼두 중 한 명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하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됩니다. 로마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의 대립 구도로 접어들었고, 원로원의 최후통첩을 받은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한 채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넙니다.
드디어 주사위가 던져진 것입니다.
승자와 패자

승자가 있다면 반드시 패자도 있는 법입니다.
카토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패배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 다수는 성질 급한 폼페이우스에게 반발하며 패배를 자초했지만, 오직 카토만은 폼페이우스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지만, 카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카토는 북아프리카의 우티카로 피신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결국 아프리카에 상륙해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원로원군과 탑수스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그대로 우티카를 포위합니다.
카토는 가족과 친구들을 설득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도록 보냈습니다.
카이사르가 적대적인 인물조차 용서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적대 관계였음에도, 누구보다 카이사르를 깊이 신뢰했던 것은 바로 이 카토였는지도 모릅니다.
가족과 친구들의 안위를 확인한 뒤, 카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동맹이자 적이었던 키케로는 카토를 기리는 글 '카토'를 써서 출판했습니다.
후세에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 단테가 걸작 '신곡'에서 카토를 연옥의 문지기로 묘사했습니다.
지옥 밑바닥에 떨어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는 확연히 다른 대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 카토에 대한 개인적 평가
소 카토만큼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도 드뭅니다.
다른 우직한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그는 곧은 성품의 인물이었고, 정치적 자세는 언제나 청렴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자신의 지위나 재산이 아니라 공화정 로마 그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자기 배만 채우는 것을 생각했다면, 카토는 진정한 애국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시대의 흐름과 조화를 이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이룩한 업적은 로마의 영토를 몇 배로 넓혔고 부도 함께 흘러들어왔습니다. 좋은 옛날의 로마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겁니다.
시대는 흐르고 사람도 변합니다.
시대는 언제나 변화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변화에 뒤처진 자들은 도태됩니다.
카토는 조금 늦거나 이르거나, 결국 도태되는 운명이었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카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