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격동하는 그리스 사회
1901년 그리스 사회의 긴장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4년 전인 1897년, 잃어버린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던 '메갈리 이데아(대이념)'는 참패로 크게 좌절된 바 있었다. 흔들리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마케도니아 땅에 대한 열망은 그리스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 역시 같은 땅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 꿈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경쟁자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2000년째 이어져 온 '언어 문제'
긴장의 정점에는 언어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의 2000년간 숙원처럼 이어진 현안으로,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신성한 위치까지 끌어올린 문제였다. 언어는 현대 그리스 국민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찬란했던 고대부터 그 시대까지 이어진 민족의 연속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민중 언어로 번역된 '마태오 복음서'
1901년 9월 9일, 신문 '아크로폴리(Acropoli)'는 알렉산드로스 팔리스(A. Pallis)가 민중 언어(데모틱 그리스어)로 번역한 '마태오 복음서'를 계속 연재하겠다고 발표했다. 성전(聖典)을 민중 언어로 옮긴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신학 교수 F. 파파도풀로스가 관련 서적을 한정판으로 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번역은 외면되지 않았고, 다른 신문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신문들 사이의 설전
초기의 반응은 미미했다. 9월 18일, 신문 '엠브로스(Embro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이것이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범죄는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질 수 있다. 단,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온 사회, 온 민족, 조국, 종교, 언어를 향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아테네의 한 신문 지면에서 종교와 우아함을 향해 벌어져 온, 스스로 만든 야만적인 복음 번역물을 내세운 이 무분별한 짓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와 팔리스를 겨냥한 비판 기사나 풍자 만화는 소수에 그쳤다. 이들은 이러한 시도가 복음을 조롱하고 모독하며 그 의미를 왜곡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의 이목은 다른 사건들에 쏠려 있었다. 9월 22일 연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같은 달 30일에 재개되었다. 신문은 이 중단이 그리스와 유럽 간 통신이 일시적으로 두절된 탓이라고 해명했다. 참고로 팔리스는 해외에 거주 중이었다.
총대주교의 개입, 그리고 커져가는 논쟁
10월 1일, 에큐메니컬(세계) 총대주교는 그리스 성시노드(정교회 최고 의결 기구)에 서한을 보내 번역본 출간을 막을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연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나, 10월 중순부터 논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팔리스는 자신의 번역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아크로폴리'는 다른 신문들의 부정적 보도에 각각 맞섰다.
이 와중에 팔리스가 불행한 1897년 전쟁 이후 그리스인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국적마저 변경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발언들은 앞세워져 그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 논쟁은 결국 1901년 11월, 번역본 복음서가 학교에서도 읽힐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아테네 시내 대규모 시위와 유혈 충돌, 이른바 '복음서 사건(Ευαγγελικά)'으로 번졌다. 군대의 발포로 여덟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다쳤으며, 정부는 총사퇴했고 민중 언어로 쓰인 복음서는 회수·금지되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