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페타 전투의 필헬렌: 그리스 국기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는 없다

페타 전투의 필헬렌: 그리스 국기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는 없다

1822년 7월 4일 벌어진 페타 전투는 1821년 그리스 혁명 기간 그리스군에게 가장 참담한 패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이기도 했다. 그리스 정규병과 소수의 필헬렌(Philhellene, 그리스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 건너온 의용군), 이오니아제도 출신 병사들은 '야만인이 넘어올 것'임을 알면서도 영웅적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할 용맹함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필헬렌 군단의 편성과 배치

페타 전선에서 그리스 정규 부대들은 전열의 중앙을 담당했다. 중앙에는 이탈리아 출신 베테랑 중령(그리스군에서는 대령) 피에트로 타렐라(Pietro Tarella)가 지휘하는 전술군단(Tactical Corps)이 자리했다.

우익에는 이오니아제도(헵타네소스) 출신 병사들이 배치되었고, 좌익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베테랑이자 이탈리아인 소장(그리스군에서는 대령) 안드레아 다니아(Andrea Dania)가 이끄는 약 150명의 필헬렌이 섰다. 인원에 대해서는 크리스토스 비잔티오스의 기록 외에 90명에서 200명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필헬렌 두 개 '중대'는 각각 스위스 출신 슈발리에(Chevalier)와 폴란드 출신 미르제프스키(Mirzewski)가 지휘했다. 경포 2문을 보유한 약 600명 규모의 이 부대의 총지휘관은 나폴레옹 전쟁의 베테랑이자 뷔르템베르크 출신 독일인 카를 폰 노르만-에렌펠스(Karl von Norman-Ehrenfels) 소장이었다.

이 정규 부대들을 근방 고지에 진을 친 약 1,500명의 비정규 그리스 전사들이 지원했다. 이에 맞서 오스만군은 기병 700명을 포함해 약 9,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정규 부대들은 방어공사를 설치하라는 권고를 무시했는데, 타렐라는 '방책은 남자의 가슴이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규 진지 앞에 임시 방어물을 세우기로 했으나, 오스만군이 공격해온 시점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스 국기… 가장 좋은 수의

7월 4일 해가 뜨기 한 시간 전, 오스만군이 그리스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오스만군 사령관 쿠타흐 파샤(Kiutachis Pasha)는 병력을 일곱 개 부대로 나누었다. 두 개 부대는 그리스 비정규병 공격에, 하나는 수령 고고스 바콜라스(Gogos Bakolas) 휘하 진지 포위에, 나머지는 그리스 정규 부대 공격에 투입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전투는 오스만군이 필헬렌을 공격하며 시작되었으나, 공격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부대들이 생기면서 정규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그리스 정규군은 창을 들고 오스만군에게 돌격하여 페타 마을 방향으로 포위선을 돌파했다. 타렐라 대령은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전술군단은 약 200명의 병력을 잃었으나, 바콜라스 휘하 병력의 엄호 속에 잔존 병력은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호메로스적인 전투가 실제로 벌어진 곳은 필헬렌 군단이 배치된 구역이었다. 여기에는 부대의 후퇴를 따라가지 못한 몇몇 정규군도 합류해 있었다. 필헬렌과 소수의 정규군은 작은 방진을 이루었고, 수천 명의 오스만군을 상대로 한동안 맹렬히 싸워 나갔다. 이 싸움의 영혼은 다니아 대령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모범으로 부하들을 고무했다. 어느 오스만 기병이 말고삐를 붙잡으며 다니아에게 달려들었다. 대령은 검으로 그를 내리쳤지만, 즉시 20명의 투르칼반(무슬림 알바니아 병사)이 그에게 덮쳐 그를 베어 쓰러뜨렸다.

12명의 폴란드인… 프랑스 대위와 깃발을 든 독일인

같은 시각, 마르제프스키 대위가 이끄는 12명의 폴란드인은 그리스를 위해 자신들만의 서사시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 용감한 병사들은 성 게오르기오스 교회에 몸을 숨기고 탄약이 남아 있는 동안 야만적인 적 무리를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이윽고 오스만군이 교회 안으로 밀어 들어왔다. 전투는 성전(聖堂)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창으로, 칼로, 검으로, 주먹으로, 이빨로, 나아가 교회 지붕의 기와조차 무기로 삼아 싸웠다… 그들은 모두 전사했지만, 바닥에는 수십 구의 적 시체가 널려 있었다.

프랑스 출신 필헬렌 모니악 대위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올리브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댄 채 검으로 오스만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검이 부러진 뒤에도 그는 계속 싸웠다. 한 오스만 병사가 그의 등 뒤에서 총을 쏘았고,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적의 창이 그의 몸에 꽂혀 그를 갈기갈기 찢었다. 몇몇 필헬렌은 언덕 위에 진지를 잡고 목숨을 값지게 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모두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오스만군의 일제 사격과 검격으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젊은 프로이센 베를린 출신 빌헬름 티히만(Wilhelm Teichmann)이었다. 그는 군단의 기수였다. 터키군 총탄에 너덜너덜해진 깃발을 두 손에 쥔 채, 그는 깃대를 창처럼 휘두르며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그렇게 전사했다…

노르만 장군 역시 온몸이 토막 날 듯한 부상을 입은 채 라가다(Lagada)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페타 원정의 발의자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Alexandros Mavrokordatos)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잃었으되, 명예만은 남았노라…' 노르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상처가 원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