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성 라자로 기사단: 나병 환자까지 기사로 받아들인 십자군 전사들의 이야기

성 라자로 기사단, 잊혀진 십자군 기사단

중세 기사단 하면 흔히 성전기사단(템플 기사단) 하나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기사단이 존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설립된 기사단 중 하나가 바로 예루살렘 성 라자로 기사단입니다.

이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보다 수백 년 앞서 창설되었으며, 처음에는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다가 이후 다른 기사단들과 함께 무장을 들고 성지를 방어하는 임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를 가장 특별하게 만든 것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병 환자를 특별히 보살폈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들을 대열에 받아들였다는 파격적인 특징입니다.

중세인들에게 나병이란 무엇이었나

오늘날 우리는 과거 사람들에게 특정 질병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였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콜레라나 흑사병처럼 치명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환자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적 배척의 대상으로 만드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몸의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야 했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가 바로 나병(한센병)입니다. 나병은 시각적으로 극심한 낙인을 남기는 증상 때문에, 전염 가능성과 더불어 환자들은 공동체에서 격리되거나 소위 '나병원(레프로소리움)'이라 불리는 시설에 유폐되곤 했습니다.

성 라자로 기사단: 나병 환자까지 기사로 받아들인 십자군 전사들의 이야기

현재는 치료법 덕분에 크게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과거 나병은 피부에 변형된 결절을 만들어 환자에게 끔찍한 외모를 남겼기에 사람들에게 진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병은 세균성 질환(마이코박테리움 레프라에(Mycobacterium leprae), 한센균)으로, 유전적 소인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치료법은 20세기에야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는 격리 조치와 함께 환자가 나무 판을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며 자신의 접근을 알리고 길을 비켜달라고 경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도구는 '성 라자로 판'으로 불렸는데, 성 라자로가 나병 환자와 거지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이 성인의 이름은 이 환자들을 돌보는 병원 기사단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370년 성 대 바실리오가 성 라자로의 후원 아래 나병 환자 수용소의 원장이 된 것이 그 시초이지만, 정식 기사단으로 조직된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제1차 십자군과 기사단의 탄생

제1차 십자군은 기사단 성장의 완벽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스피탈러 기사단의 창시자이자 예루살렘 성 요한 병원의 원장이었던 제라르 텀(Gerard Tum)은 도시의 정복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게 시설을 제공했고, 고드프루아는 그를 원장으로 확정했습니다. 이후 병원에서는 성벽 밖 나병 환자 시설(라자레토)이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기사단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문서는 1227년 병원에 자선 기부를 하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수여한다는 내용의 것이며, 1255년에는 교황 칙서가 라자리스트들이 성 아우구스티노 회칙에 따라 운영될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무렵 새로운 기사들은 이미 첫 전투인 가자 전투(1244년)에 참여해 전원이 전사했으며, 만수라 전투(1250년)와 아크레 방어전 등 여러 전역에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성 라자로 기사단: 나병 환자까지 기사로 받아들인 십자군 전사들의 이야기

왜 군사 기사단이 되었는가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반포한 칙서 Cum a nobis는 이 병원 기사단에 군사적 구조를 부여했고, 이후 기사단은 성 바실리오 회칙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있었을까요? 사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 라자로 기사단의 가장 특이한 특징 중 하나는 기사가 나병 환자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론 총장 선거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의 열악한 위생 조건은 감염을 부추겼고, 다른 군사 기사단 소속이었던 많은 기사들이 이 병에 걸려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전사 수도사로서의 생활 방식을 이어갈 대안을 이곳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1120년에 사망한 제라르 텀의 후계자 목록에서 추론되며,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왕들(The Book of Kings of the Latin Kingdom of Jerusalem)의 일부 단편에서도 확인됩니다. 거기에는 나병에 걸린 성 요한 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은 습복을 버리고 라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술이 본업인 수많은 기사들이 새 기사단에 합류하면서, 기사단의 정신은 변모하고 확장되었습니다.

나병왕 발두앵 4세와 기사단의 전성기

기사단의 전성기는 발두앵 3세 재위 기간에 열렸습니다. 13세 소년 군주가 어머니 멜리센드의 섭정 아래 있던 시기, 십자군이었던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라자리스트 기사들을 자국으로 데려오면서 기사단은 유럽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 후 1174년, 발두앵 4세가 예루살렘에서 즉위했습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나병왕(Leper King)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사단의 새로운 전사적 성격을 공식화한 인물이 바로 그였습니다.

발두앵은 베카 전투, 몽기사르 전투 등 자신의 원정에서 라자리스트 부대의 호위를 받았는데, 이들은 필사적으로 끝까지 싸웠습니다. 패배하더라도 어차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적도 나병에 걸린 포로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즉시 처형했으니, 그들에게 전장은 일종의 '자살 임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기서 나병에 걸렸던 기사 지스몽 다르시(Gismond D'Arcy)의 유명한 위업이 탄생합니다. 전투 중 왕이 쓰러져 포위당하는 것을 본 그는 몸으로 왕을 감싸고, 자신의 팔 한쪽을 잘라 공격자들에게 던졌습니다. 그것을 잡으면 전염될까 두려워 겁에 질린 적들은 도망쳤고, 이슬람군은 도망치며 모하메드를 상징하는 녹색 깃발을 버렸습니다. 이후 이 색은 성 라자로 기사단과 연결되어, 흰 바탕에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기가 기사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라자리스트들은 또한 아크레 주교가 운반하는 성십자가의 성유물을 보호한 공로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것은 끔찍한 하틴의 뿔(Horns of Hattin) 전투(1187년)에서였는데, 이 패배 직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손에 넣게 됩니다.

몰락과 유럽으로의 이동

성지에서 영토를 잃은 기사단은 제3차 십자군 때 아크레가 재정복되면서 그곳에서 보상을 받아 새로운 병원과 나병원을 건립하고 여러 성을 쌓으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1244년 십자군이 새롭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라자리스트 전원이 학살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기사단 구성원들의 이런 높은 사망률은 앞서 언급한 이유, 즉 포로가 될 수 없는 처지 때문이었고, 1291년 아크레 방어전(그리고 도시의 상실)에서도 같은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은 유럽으로 향했고, 기사단은 더 이상 그 경계를 넘지 않았습니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미남왕, 부르고뉴의 필리프가 아닌)의 보호 아래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지만, 무기를 내려놓지는 않아 잔 다르크의 군대에서도 싸웠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모든 기사단을 몰타 기사단 아래 하나로 통합하려 한 시도에서 왔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해산 명령 이행을 회피했고, 라자리스트와 프랑스 왕가 사이의 유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이 기사단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군사적 성격을 분명히 내려놓고 환자 돌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병 환자만이 아니라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어차피 나병은 의학의 발전과 함께 점차 통제되고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