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개요
장 마티외 필리베르 세루리에(Jean-Mathieu Philibert Sérurier, 1742년 12월 8일 라온 ~ 1819년 12월 24일 파리)는 프랑스 혁명기의 장군이자 제국 원수(1804)였다. 그는 제국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왕정복고 이후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으로서 명예를 누렸다.

- 세루리에, 장 마티외 필리베르 백작
군 경력의 시작
1755년, 겨우 13세의 나이로 라온 민병대 소위가 되었으나 그의 진급은 매우 더디게 이어졌다. 1759년에는 오몽(Aumont) 보병연대에서 교관으로 복무했고, 독일 전역에 참전하여 1760년 바르부르크(Warburg)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구왕정(舊王政) 시기
세루리에는 7년전쟁 당시 프로이센군과 직접 싸워본 몇 안 되는 나폴레옹 휘하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이후 포르투갈로 파견되었고, 보스(Beauce) 보병연대의 중위로 임명되었다. 1770년에는 코르시카에서 마르뵈프(Marbeuf)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뒤 1778년 대위로 승진했다. 1788년 은퇴를 신청했지만, 이듬해인 1789년 메독(Médoc) 보병연대 지휘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위기
페르피냥에 주둔한 제70연대의 중령이던 세루리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선동된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열정적인 애국 병사들 앞에서 그의 귀족 출신 신분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결국 망명을 준비하던 그는 1792년 10월 10일 계급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바라스(Barras)의 도움으로 복권되었고, 1793년 6월 25일 이탈리아 방면군 준장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 원정
세루리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피에몬테 군과 맞서 싸웠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진중함과 용맹함으로 인정받으며 보나파르트의 신뢰를 얻은 측근 장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몬도비 전투(1796년 4월 21일), 카스틸리오네 전투, 로나토 전투, 라 파보리트(La Favorite) 전투(1797년 1월 16일) 등에서 공헌했다. 특히 1797년 2월 2일 만토바 공방전과 탈리아멘토 강 도하 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보나파르트는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어떤 모략에도 가담하지 않는 이 장군을 깊이 신뢰하여, 1797년 6월 적에게서 빼앗은 군기를 총재정부에 헌상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베네치아 공화국은 거의 전역이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797년 10월 18일 베네치아 총독으로 임명된 세루리에는 3개월 뒤 철수를 지휘하며 식량, 탄약, 무기와 더불어 수많은 예술품을 함께 철수시켰다.
나이가 많아 이집트 원정에는 참여하지 못한 그는 이탈리아 방면군 내에서 새로운 지휘관 자리를 찾았다. 1799년 3월 26일 파스트렌고(Pastrengo)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같은 해 루카를 점령했으며 셰레르(Scherer) 휘하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베로나 공방에서 실패했고, 결국 4월 28일 월등히 우세한 적군 앞에서 베르데리오(Verderio)에서 항복해야 했다. 수보로프(Souvarov)에 의해 서약 석방된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제국 시대
청렴결백한 성품 덕분에 '이탈리아의 처녀(La Vierge d'Italie)'라는 별명을 얻은 세루리에는 파리 주르 포앙트(Point du Jour)의 예비군을 지휘하며 브뤼메르 18~19일의 쿠데타가 원활히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2월 첫 번째 임명에서 그를 상원 의원으로 기용했다.
1802년 상원 부의장, 1803년 상원 집행관을 지낸 그는 제정 전 기간 내내 앵발리드(Hôtel des Invalides) 원장을 역임했으며, 1804년 제국 원수, 1805년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 1808년 제국 백작에 올랐다. 1809년에는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정사, 나아가 역사 전체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화형식(auto-da-fé)'을 집행한 인물로 기록된다. 1814년 3월 30일 밤부터 31일까지,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루이 14세의 전쟁 이래 적에게서 빼앗은 1,417개의 군기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검과 훈장을 앵발리드 안뜰에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그 재는 이후 센강에 뿌려졌다.
왕정복고와 말년
세루리에는 상원에서 나폴레옹 1세의 폐위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루이 18세에게 귀순하여 프랑스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백일천하 동안 황제 곁으로 돌아갔음에도 어떤 정치·군사 활동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두 번째 왕정복고는 그를 엄중히 다스렸다. 그는 강제 은퇴 처분을 받았고, 네(Maréchal Ney) 원수의 처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귀족원에서도 배제되었다. 앵발리드 원장 자리 역시 코니(Duc de Coigny) 공작에게 넘어가야 했다.
생루이 대십자 훈장을 받은 직후인 1819년 1월 1일에야 비로소 그는 프랑스 원수의 품위를 되찾았다. 같은 해 12월 24일 파리에서 생을 마친 그의 유해는 1847년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 '자물쇠 장이(Serrurier)'의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