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롤로: 바이킹 약탈자에서 노르망디의 초대 공작으로

롤로: 바이킹 약탈자에서 노르망디의 초대 공작으로

롤로(Rollo, ?~930년경)는 노르만족의 지도자로서, 911년부터 927년까지 노르망디의 초대 공작이자 영주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이야기 대부분은 생캉탱의 성직자 두동(Dudon de Saint-Quentin)이 저술한 『노르망디 공작사』에 담긴 방대한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내용들은 신뢰도를 고려해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미궁 속의 출신: 덴마크설과 노르웨이설

두동의 기록에 따르면 롤로는 고귀한 혈통의 덴마크인으로, 잉글랜드에서 덴마크 왕 아델스탄의 후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대륙으로 건너가 885년 파리 포위전에 가담했고, 890년에는 하(下)세느 일대의 노르만족을 이끌고 바이외 백작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그의 딸과 '덴마크식', 곧 번거로운 의식 없이 간소하게 결혼했다. 891년에는 리지외를 약탈했으며, 훗날 '노르망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끝에 루앙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 노르웨이의 사가(영웅담)는 그를 해적 행위로 인해 조국에서 추방되어 헤브리데스 제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결혼한 노르웨이인 '로프(Rolf)'로 묘사하며,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롤로의 정확한 출신이 덴마크인지 노르웨이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연이은 실패와 타협의 시간

출신이 어디든 롤로는 전임 지도자들처럼 910년 파리 함락을 다시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더 큰 위기는 그 직후 찾아왔다. 911년 7월, 서프랑크 왕 카를 3세 '단순왕(Charles le Simple)'이 샤르트르 근교에서 그를 또다시 격파한 것이다. 장기간의 약탈과 원정으로 지친 롤로의 군대는 이제 안정된 거점과 지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한편 단순왕 역시 되풀이되는 노르만족의 약탈과 약행을 종식시키고 싶어 했다. 양측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루앙 대주교 비통(Witon)과 파리 백작 로베르의 중재로 911년 가을,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점령한 땅의 경계에 위치한 생클레르쉬르에프트(Saint-Clair-sur-Epte)에서 합의가 성립되었다.

생클레르쉬르에프트 조약(911)

이 조약은 '세느강 유역의 노르만족, 즉 롤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루앙, 에브뢰, 리지외 세 교구를 부여하는 대신, 프랑스 국왕에 대한 봉신 관계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롤로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양도받은 땅을 평화롭게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약속이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 아래 이를 지켰다. 프랑스 공작 로베르와 부르고뉴의 라울이 단순왕에 맞서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롤로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다만 단순왕이 라울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상황을 빠르게 판단해 새 왕을 인정했고, 그 대가로 923년 세느강과 에르 강 사이의 베르논 지역과 함께 바이외, 르망 교구, 그리고 사실상 묵시적으로 셰스 교구까지 추가로 받았다.

'질서와 평화'의 통치

자신의 영토 안에서 롤로는 명성 높은 질서와 평화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증명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롤로가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금팔찌가 몇 달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도둑이 들 걱정이 없을 만큼 치안이 좋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법은 경작 도구를 일을 마친 뒤 들에 두고 돌아오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농기구를 제자리에 두어도 누군가 훔쳐갈 염려가 없을 정도로 그의 땅이 안전했다는 의미다.

이러한 바이킹 출신 지도자의 강력한 치안 활동은 노르망디의 전통인 '클라모르 드 하로(clamor de haro)', 즉 최고 권위에 호소하는 외침과도 연결된다. 전승에 따르면 'haro'라는 말은 '아! 롤!(Ah! Rollo!)'을 줄인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이상화할 수 없는 인물

그러나 롤로를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안 된다. 전직 해적이던 그는 동료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계속 이어가도록 장려함으로써, 정복당한 주민들을 수탈하는 한편 스스로의 지도자 권위를 유지했다. 그 자신도 성인(聖人)이 아니었으며, 912년에 받은 세례가 그를 곧바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연대기 작가 아데마르 드 샤반(Adhémar de Chabannes)에 따르면, 죽음이 다가오자 정신을 잃은 롤로는 자신이 숭배하던 우상들을 기리기 위해 기독교 포로 백 명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라고 명령한 뒤, 세례를 받은 진정한 신을 기리며 금 백 파운드를 기독교 교회들에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분명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세례 이후에도 그 안에 공존하던 이교와 기독교, 약탈자와 통치자라는 두 얼굴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