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라이 학살: 베트남 '더러운 전쟁'이 남긴 가장 어두운 흔적

미라이 학살: 베트남  더러운 전쟁 이 남긴 가장 어두운 흔적

베트남 전쟁은 '더러운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마치 역사상 '깨끗한' 전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게릴라전이라는 전쟁의 특수한 성격 자체가 처음부터 전쟁의 규칙을 넘어선 혹독하고 잔혹한 투쟁을 만들어냈다.

양측 모두 저지른 전쟁범죄

거의 모든 전쟁에서 그러하듯 양측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북베트남이 명백히 우위에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들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는 주민들 사이에서 확보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선전 덕분이 아니라, 잔혹한 공포 정치를 통해서였다. '반응파(反共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은 즉결 처형되었다. 후에(Hue)에서만 테트 공세 당시 약 5,000명의 '이단자'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은 이에 맞서 '피닉스(Phoenix)' 작전으로 대응했고, 이 프로그램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미국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군은 공산주의 세력의 테러에 같은 방식으로 보복한 것이다. 한편 남베트남 정권 역시 사이공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주민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테러를 자행했다.

그리고 어느 쪽도 포로를 크게 아까워하지 않았다. 선전용이나 정보 수집에 유용한 경우는 예외였는데, 북베트남에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나 미군에게 항복한 북베트남 조종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학살의 시작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션 시티(Junction City)' 작전 당시 미군은 적성 사망자 2,728명에 비해 포로는 단 34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영원히 상징하게 된 사건은 단연코 미라이(My Lai)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제20보병연대 제1대대 제3중대가 당시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베트남의 작은 마을 미라이 근교에 헬리콥터로 착륙했다. 이 중대를 지휘하는 것은 젊은 예비역 윌리엄 칼리(William Calley) 중위였다.

이 장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부하들은 그를 "지도조차 읽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상급 지휘관들은 그에게 전투 지휘권을 맡길 만하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신경이 곤두선 부대, 빈손으로 돌아온 수색

칼리와 부하들은 베트콩 게릴라가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마을로 진격했다. 정보는 아마도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군 도중 저격병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고, 몇몇 병사는 부비트랩에 다치기까지 했다. 결국 마을에 들어섰을 때 모두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 있었고 사기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베트콩 수색은 허탈하게 끝났다. 애초에 존재했더라도 이미 도주한 후였던 것이다. 이에 칼리는 부하들에게 마을 안의 모든 베트남인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노인, 여성, 아이들을 포함한 총 347명이었다. 병사들은 일부는 마지못해, 일부는 순순히 명령에 따랐고, 살육의 참극이 벌어졌다. 여러 민간인이 총검에 찔려 학살당했다.

젊은 여성들은 강간당한 뒤 처형되었다. 희생자를 직접 마주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그들을 오두막에 가둔 뒤 수류탄 묶음을 던져넣었다. 한 병사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모아 땅바닥에 앉혔다. 그러자 칼리가 와서 말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겠지.' 우리는 예라고 대답했다. 단지 잘 감시만 하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또 와서 왜 아직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저들을 죽여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자 나는 총구를 겨눴다."

"나는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탄창 네 개를 모두 비웠다." 그러나 이 학살은 미 육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다.

진실의 폭로

약 1년 뒤인 1969년 4월, 칼리의 부하였던 병사 로널드 리덴아워(Ronald Ridenhour)는 양심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귀국 후 닉슨 대통령과 미국 정부 요인들, 그리고 언론에 공개 서한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편지들은 미국 사회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여론의 압박에 못 이긴 미 육군은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심문은 1970년 3월까지 계속되었고, 400명이 넘는 증인이 조사를 받았다. 결국 15명의 장교, 즉 칼리의 상급 지휘관들과 칼리 본인에게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큰 손'들은 모두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석방되었다.

오직 칼리만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바로 석방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고, 심지어 그리스도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칼리 사건만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었다. 같은 날, 미라이에서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5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미군 병사들에 의해 냉혹하게 처형되었다.

히틀러에게 보낸 보고와 흡사한 보고서

가장 놀라운 것은 단연 칼리의 상급 지휘관이 사이공의 미군 본부에 보낸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미라이 전투'에서 베트콩 128명을 사살했으나 발견된 무기는 단 3정이었다고 적었다. 이는 1942년 무장친위대(SS) 장군 폰 데 바흐-첼레프스키가 약 4,000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학살한 뒤 무기를 82정만 발견했다며 히틀러에게 보낸 보고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학살이 남긴 여파

미라이 학살은 '할리우드'에서 배운 교육 외에는 제대로 된 교양 없이, 선한 카우보이와 악한 인디언이라는 흑백논리에 익숙한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평범한 미국인들은 '선량한' 자국민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미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 아니었으며, 안타깝게도 마지막이기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반대 결론, 즉 미국인이 '악당'이고 북베트남이 '성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전쟁에서도 성인은 없었고,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결국 북베트남 역시 전쟁 중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수십 명의 미군 포로가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뒤에도 북베트남에 억류되어 있었고, 이는 '실종된 미군'이라는 새로운 전설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