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와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나 혼자 죽을 것이다'… 1 대 3의 기적을 만든 주베

 나와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나 혼자 죽을 것이다 … 1 대 3의 기적을 만든 주베

긴장 고조된 1867년, 가리발디의 로마 원정

1867년,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다시 한번 긴장감으로 치닫고 있었다. 1866년 이탈리아 왕국(피에몬테)은 오스트리아에 패배했지만, 프로이센이 쾨니히그레츠에서 거둔 결정적 승리 덕분에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은 그때까지 프랑스의 보호를 받아오던 교황령을 자국의 '보호 아래' 두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세페 가리발디는 로마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즉각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교황을 이탈리아의 "수치이자 상처"라고 규정했고, 1만 명의 병력을 규합해 영원한 도시 로마를 향해 행군을 개시했다.

침공의 시작

가리발디 군은 1867년 10월 라치오 지방을 침공했다. 이들은 로마 내부의 동조 세력들과 접촉해 도시를 기습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22일, 70명의 가리발디 추종자들이 배를 타고 티베르 강을 따라 로마로 잠입했다. 같은 시각 도시 안에서도 가리발디파를 지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반란군은 도시 방벽 일부를 폭파했고, 이 과정에서 정예 부대인 주베 연대 소속 교황 병사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교황군은 반란을 신속히 진압했고, 배로 도착한 가리발디파는 교황 주베 부대에게 포위되어 무력화되었다. 한편 가리발디 본대는 로마에 접근했지만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 끝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군의 반격 준비

로마 내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교황파는 이제 반격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물론 병력 수에서는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독일 출신 장군 헤르만 칸츠러(Hermann Kanzler) 휘하의 교황군은 총 5,100명으로, 두 개의 제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제대는 스위스 출신 드 쿠르트(de Courte)가 지휘했으며, 교황 주베 연대(2개 대대 – 1,500명), 외국 카라비니에리 대대(스위스 저격병, 약 500명), 앙티브 의용대대(프랑스·벨기에 등 다국적 자원병 – 540명), 기병 중대(106명), 공병 중대(80명), 헌병 분견대(50명), 그리고 경포 6문을 운용하는 포병 부대로 구성되었다. 두 번째 제대는 갈로 드 폴(Gallo de Pole)이 지휘하며 프랑스 보병 2,000명, 기병 100명(프랑스인 50명, 교황군 50명), 경포 3~4문을 담당했다.

멘타나 전투

1867년 11월 3일 아침은 어둡고 축축했다. 소규모 교황군은 로마를 떠나 약 20km 떨어진 작은 마을 멘타나(Mentana)로 진군했다. 가리발디 군은 그곳에 이미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다. 붉은 셔츠의 가리발디파는 수적 우위는 물론, 요새화된 진지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다가올 전투의 승패는 이미 예정된 듯 보였지만… 그곳에는 '주베(Zouaves)'가 있었다.

교황군을 이끄는 칸츠러 장군은 멘타나에 접근하면서 주베 3개 중대에게 가리발디군 우익 후방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나머지 병력은 정면으로 적에게 진격했고, 프랑스군은 약 2km 뒤를 따랐다. 적을 발견하자 칸츠러는 즉시 정면의 적 3개 대대에 대한 공격을下令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주베 4개 중대가 산개대형으로 전진해 순식간에 인근 숲에 숨어든 적을 소탕했다. 이윽고 주베 연대장 드 샤레트(de Charette)가 직접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며 적진으로 돌격했다. 가리발디파는 이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전진하라, 주베! 나와 함께 가지 않거든 내가 혼자 죽을 것이다"

패주한 가리발디파는 요새화된 사두치(Saducci) 포도원에 도달해서야 도주를 멈췄다. 포도원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내부에는 석조 건물이 서 있었다. 주베는 스위스 카라비니에리와 앙티브 군단의 지원을 받아 즉시 공격에 나섰으나, 첫 공격은 격퇴당했다.

그러나 말 위에서 드 샤레트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전진하라, 주베! 나와 함께 가거든. 아니면 내가 혼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검을 적을 향해 겨눈 채, 아직 피가 흐르는 몸으로, 방금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가리발디파 장교의 모자를 고정한 채 탄우(彈雨) 속을 과감히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주베들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령의 말은 적의 화망에 쓰러졌고, 드 보(de Beaux) 대위가 그 곁에서 전사했다. 그럼에도 주베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며 가리발디파를 격퇴했다. 패잔병들은 일 콘벤티노(Il Conventino) 수도원으로 후퇴해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포병의 화망 지원과 함께 주베는 스위스군과 협공해 수도원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가리발디파도 주베의 총검 돌격 앞에서 그곳마저 내팽개치고 물러났다. 가리발디는 생존 병력을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성으로 옮겼고, 포병의 화력을 등에 업고 교황군의 진격을 저지한 뒤 자신보다 훨씬 적은 교황군의 양 측면을 공격하기로 했다.

측면 공격의 실패, 그리고 알레 대령의 여유

한쪽 측면에서 가리발디파는 스위스군과 격렬하게 교전했지만, 소수의 스위스군은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오히려 적을 패주시키고 추격까지 감행했다. 다른 측면의 공격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가리발디파는 앙티브 군단에게 완패한 것이다.

양 측면의 패배를 목격한 가리발디는 사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교황군 중앙, 즉 주베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주베는 끝내 버텨냈다. 칸츠러는 프랑스군의 개입을 요청했지만, 사실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알레(Ale) 대령의 태도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적이 자신을 조준하는 것을 본 대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병사들 역시 흔들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가리발디가 발포했지만 빗나갔다. 그러자 알레는 웃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보게. 조준하고 쏴놓고도 나를 못 맞혔어. 소총을 다오."
소총을 받아든 그는 침착하게 조준한 뒤 상대를 쓰러뜨렸다.

한편, 가리발디군 우익을 담당하던 주베 3개 중대가 적 후방에 모습을 드러냈고, 프랑스군도 마침내 적 좌익에 대한 공격에 합류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가리발디파는 완전히 붕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투는 끝났다.

패자인 가리발디파의 사상자와 포로는 2,100명을 넘었다. 반면 교황군의 사상자는 단 144명에 불과했다. 사실상 3,000명의 교황군 병사가 세 배가 넘는 적을 혼자 힘으로 격파해 낸 것이다.

 나와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나 혼자 죽을 것이다 … 1 대 3의 기적을 만든 주베
 나와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나 혼자 죽을 것이다 … 1 대 3의 기적을 만든 주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