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3년, 오스만 제국은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번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은 터키군이 빈으로 진격할 것을 우려하여 가용한 소수의 병력을 헝가리 라바(Raab) 강 유역에 집중 배치했고, 그 외 지역은 사실상 스스로를 지키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 공성전의 무대는 드라바(Drava) 강과 그 지류인 무라(Mura) 강이 만나는 하천 합류점, 즉 현재의 크로아티아–헝가리 국경 지대에 세워진 작은 요새였습니다.
불과 1,900명의 수비대
요새에는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율리우스 폰 호엔로에(Wolfgang Julius von Hohenlohe)의 지휘 아래 약 1,900명(오스트리아·독일인 1,200명, 헝가리·크로아티아인 700명)이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북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제국군 주력 부대 3만 명 미만이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수비대는 화포 24문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식량과 보급품을 최대한 모았습니다. 심지어 포위군이 될 터키군의 보급 물자마저 선제적으로 습격해 거두어들였다고 합니다.
반면 마주한 상대는 알바니아계 대재상 아흐메트 '파질'(현자라는 뜻) 쾨프륄루(Ahmed Köprülü)가 이끄는 최소 10만 명의 대군, 즉 터키인 7만과 타타르인 3만이었습니다. 기독교 진영에게 다행인 점은 요새 둘레벽의 4분의 3이 두 강으로 덮여 있어, 공격이 좁은 통로 하나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포위전 개시
6월 초, 거대한 오스만 군대가 요새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6월 5일 대재상은 공성 개시를 명령했고, 터키군은 뗏목을 만들어 거의 모든 방면에서 소수의 수비대를 향해 맹렬히 돌격하며 방어선을 압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그들이 얻은 것이라곤 시체로 가득 찬 주변 지역뿐이었습니다.
6월 8일, 아흐메트는 중포병에게 발포를 명령했습니다. 터키군은 두 곳의 포대를 구축했습니다. 집중적인 포격 후 터키군은 광신적인 열정과 추진력으로 새로운 공격을 감행했지만, 기독교 수비대는 사자처럼 싸워 터키군을 문자 그대로 베어 넘겼습니다. 이후 포격, 공격, 터키군 학살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윽고 터키군은 성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며 수비대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호엔로에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이 요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관 바론 다방쿠르(d'Avancourt)에게 1,500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출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실제로 이 기독교측 역습은 터키군을 완전히 기습했습니다. 터키군의 공성 참호는 파괴되고 대포는 묻혔으며, 수백 명의 터키군이 잔혹하게 살육당했습니다. 이 불청객 같은 충격 이후 터키군은 대책을 세웠고, 이후 또다른 기독교측 출격은 성공적으로 저지되었습니다.
끝없는 공격
강습으로 요새를 함락하는 데 실패한 터키군은 벽을 무너뜨리고 폭파하기 위한 지하 갱도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포대가 구축되어 가장 무거운 터키 대포가 설치되었고, 이 대포들은 끝까지 기독교 수비대를 향해 발포를 멈추지 않으면서 터키 보병과 하마 보병의 차례차례 이어지는 공세 물결을 지원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몬테쿠콜리(Montecucoli) 원수는 요새에 약 1,000명의 증원을 투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불가능했고, 그는 수비대에게 이를 분명히 알린 뒤 해당 지역의 자신의 병력을 서서히 철수시켰습니다.
칼과 피
6월 24일부터 터키군은 공격을 요새의 성채(citadel)에 집중했습니다. 첫 습격에서 기독교 수비대는 화망으로 터키군을 문자 그대로 베어 눕혔습니다. 어차피 터키군이 워낙 많았기에 수비대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그날 밤과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수천 구의 터키군 시체가 성벽 아래를 가득 메우자, 재상 아흐메트는 공격 중지를 명령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 수비대는 터키군이 기세가 꺾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준비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터키군은 대형 목교를 건설하고 참호를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수비대는 낙담하지 않고 이 틈을 활용해 심하게 손상된 성벽을 수리했습니다.
이후 며칠간 터키군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다방쿠르는 중상을 입었고, 타소(Tasso) 대령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수비대는 이미 소진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6월 30일 대재상은 총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수비대는 막대한 손실에도 버텨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몬테쿠콜리는 수비대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면 요새를 폭파하고 탈출을 시도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철수와 파괴
포위된 수비대에게 다행히도 7월 1일부터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는 지칠 줄 모르고 싸워온 수비대에게 하늘이 내린 은혜와 같았고, 터키군의 진격을 늦추었습니다. 그러나 수비대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요새를 버렸습니다. 임시 교량을 건너 몬테쿠콜리의 군대와 합류하려던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수는 요새에 남아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터키군은 '승리' 후 요새를 완전히 평평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터키군의 손실은 처참했습니다. 공성전에서 최소 1만 명을 잃은 반면, 기독교측의 손실은 약 2,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요새는 결코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습니다. '아시아의 야만'에 맞서 싸운 용감한 소수를 기리는 기념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