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추기경이 지은 팔레 루아얄(Palais-Royal)은 오랫동안 일반인에게 문을 닫고 있다가, 이제 다시 산책과 오락을 위한 공간으로서 본래의 역할을 되찾았습니다. 왕립 궁전 정원은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사각형 구조물의 중앙에 자리합니다. 한쪽 면에는 국무원(Conseil d'État), 헌법평의회,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 세 면의 회랑에는 문화부 청사, 패션 부티크, 가구·골동품 상점,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테랑 대통령 시기에 정원이 한층 아름답게 다듬어졌는데, 안뜰에는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의 흑백 줄무늬 기둥(1985~1986)과 폴 뷔리(Pol Bury)의 움직이는 구체 조형물(1985)이 설치되었습니다.
리슐리외의 팔레 카르디날
갈로-로마 시대에 현재 왕립 궁전과 정원이 있는 자리는 뤼테스(Lutèce) 북서쪽 끝자락, 루브레(Rouvray) 숲이 펼쳐진 곳이었습니다. 1781년 나무를 심던 중 두 개의 상당히 큰 규모의 지상 수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곳에 파리 최초의 목욕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출토된 주화를 통해 그 연대는 270년경으로 추정되며, 일부 구역에서는 깊이가 2미터에 달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약 100년 후 이 시설의 사용이 중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624년 재상이 된 리슐리외는 루브르 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샤를 5세 성벽 근처에 첫 저택을 지었고, 1633년 성벽이 해체되자 인근 토지를 매입하여 규모를 키웠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건물은 '팔레 카르디날(Palais Cardinal)'이라 불렸습니다. 정원에는 분수가 있는 두 개의 큰 연못과 동상, 화단이 있었으며, 느릅나무 두 열과 작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합니다. 리슐리외는 죽기 전 자신의 궁전을 국왕 루이 13세에게 유증했습니다. 이후 섭정이 된 오스트리아의 안느는 두 아이와 함께 루브르를 떠나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1643년 10월 이곳은 '왕립 궁전', 즉 팔레 루아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1644년 마자랭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자리에 있는 튜부프 호텔(Hôtel Tubeuf)에 머물며, 정원을 가로질러 여왕을 찾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어린 루이 14세는 정원의 큰 연못에 빠져 익사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의 놀이 친구 중에는 여왕 시녀들의 하녀 딸이 있었는데, 루이는 그녀와 함께 궁전 부엌에서 '왕과 왕비 놀이'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 정원에서 마자랭은 어린 국왕을 위해 소형 사냥을 마련하고 말타기를 가르쳤으며, 작은 요새를 통해 전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롱드(Fronde)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 행복한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왕립 궁전의 변화
첫 번째 변화는 1730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늙은 느릅나무들이 잘려나가고, 두 개의 연못은 하나로 합쳐졌으며 물 분수가 설치되었습니다. 루이 15세 시대에 대중에게 개방된 정원의 중앙 통로에는 서적상의 오두막이 들어섰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젊은 여인들이 나타났으며, '크라코프 나무(Tree of Krakow)'가 심어져 그 주변으로 소설가, 산책객, 한가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벤치도 설치되었습니다. 디드로 역시 이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나는 습관처럼 저녁 다섯 시쯤 팔레 루아얄을 산책하네. 아르장송 벤치에서 홀로 몽상에 잠긴 내 모습을 언제든 볼 수 있을 걸세."
필리프 도를레앙(Philippe d'Orléans)은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오늘날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1781년부터 1784년까지 정원의 세 면에 약 60개의 파빌리온을 건설했습니다. 건축가 빅토르 루이(Victor Louis)가 설계한 이 아케이드식 파빌리온들은 1층에는 상점과 회랑이, 위층에는 개인 주거가 들어섰습니다. 빅토르 루이는 궁전 건물들도 복원했는데, 특히 화재로 소실된 오페라 하우스를 테아트르 프랑세(Théâtre-Français)로 재건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혁명기 동안 민중 소요의 격전지였던 이 궁전은 1793년 국가가 매입했고, 이후 보나파르트 가문에 몰수되었다가 왕정복고기에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루이 필리프는 목조 회랑을 고전 양식의 웅장한 주랑으로 교체하며 궁전을 다시 복원했습니다.
왕립 궁전의 정원
18세기에 주변 거리 건설로 인해 정원은 약 3분의 1가량 축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로얄 플라스(Place Royale)보다 더 활기차고 역동적인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겨울에는 밤 11시까지, 여름에는 새벽 1시까지 문을 열었지요. 군인, 앞치마 차림의 여성, 제복 입은 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었고, 오직 연인들과 우아한 귀부인들만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나파르트도 1787년 이곳에서 인생 첫 연애를 경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정원에는 경찰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혁명의 씨앗이 바로 여기서 싹텄습니다.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 탁자 위에 올라 백성들에게 무기를 들고 일어설 것을 호소했을 때, 사람들은 나뭇잎을 뜯어 삼색 리본 대용의 표식이자 결집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정원 주변의 회랑은 다양한 만남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지식인과 창녀, 도박장과 도박 클럽, 문고, 그리고 훗날 명성을 얻게 될 레스토랑들이 이곳에 자리했습니다.
샤를 10세(1824~1830) 치세에 정원은 추가로 개조되었고, 1836년 도박장들이 사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에 이르러 정원은 드디어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열린 공간이 되었습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가족부터 평범한 노동자들까지, 누구나 이곳을 찾았습니다.
오늘날의 팔레 루아얄
정원의 골목길은 피나무와 붉은 밤나무가 늘어서 있고, 물줄기로 장식된 중앙 연못과 화단이 어우러져 파리 한복판의 진정한 평화로운 안식처를 이룹니다. 정원 중앙에는 '뱀 조련사(The Snake Charmer)', '양치기와 염소(The Shepherd and the Goat)' 같은 대리석 조각들이 방문객을 몽환적인 상상 속으로 초대합니다.
1986년, 다니엘 뷔렌은 검정과 흰색 대리석 기둥들을 정원 입구이자 왕립 궁전의 메인 안뜰에 설치했습니다. 파리 한복판, 프랑스 유산의 상징적인 장소에 현대 예술작품이 들어서자 수많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또한 이 정원은 1997년부터 조각품 기획전을 위한 임시 전시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옛 파리의 지식』 – 자크 이예레(Jacques Hillairet). Shores, 2005.
- 『왕립 궁전』 (Lambert/Massounie). Routes, 2010.
- 『팔레 루아얄의 역사: 두 개의 단상』 – 다니엘 뷔렌. Actes Sud, 2010.